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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땅에는 아직도 일제식민지 시절 강제연행 되어 일본으로 끌러가 탄광이나 댐, 비행장 건설현장에서 참혹한 노동을 견디다 이름 없이 죽어간 많은 조선인들의 유해가 묻혀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일제식민지와 관련되어 벌어졌던 수많은 역사의 모순과 불합리들을 마치 손 뻗어 닿을 수 없는 먼 과거의 일처럼 여기곤 합니다. 많은 이들은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채 바래져가는 그 가엾은 시간의 조각들을 잊지 않으려 끊임없이 아우성치는 사람들의 목소리들을 애써 외면하기 위해 현실이라는 현재의 고단함을 말합니다. 불과 100년도 되지 않은, 아직도 눈물과 고름이 뒤범벅되어 방치된 그 시간들을 말입니다.

왜 굳이 기억해야 합니까. 그것은 일 년에 한번 씩 광복절이 되어서나 TV에서 특집으로 방영하는 프로그램을 보면서 감상에 젖으며 애국심을 상기하는 것으로 족하지 않느냐고 반문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국민이나 민족과 같은 그 알 수 없는 모호한 사명감 같은 것에 기대어 연례행사처럼 과거를 말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배고프면 밥을 먹고, 졸리면 잠을 자고, 넘어지면 아픈, 우리가 그나마 선명하게 확신할 수 있는 지극히 당연한 삶 속의 공감에서 오는 감수성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 큰 세상을 향해 나아갈 에너지로 충만한 젊은이들이 식민지 조국에서 점령국에 의한 모집을 앞두고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요. 만약 우리가 다음날이면 울먹이는 가족들을 뒤로하고 일본의 노동현장으로 떠나야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면, 어떤 생각들로 밤을 지새웠을까요. 이젠 돈을 벌 수 있다는 희망에 들떠있었을까요. 아니면 전장에 끌러갈 형을 대신하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복잡한 마음을 위로했을까요.

이쯤에서 우리는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강제징용, 강제연행이라고 불리는 그 선택 앞에서 그것이 자발적이었는지 강제적이었는지 묻는다는 것조차 무의미해지는 이 순간을 마주하며, 그것이 선택이란 단어로 온전히 표현될 수 있는 것인지 다시 한번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간에도 지층이 있다면 우리는 물기가 채 마르지도 않은 그 시간들을 밟고 서 망각위에 집을 짓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지리멸렬한 현실의 고단함 때문에 말입니다. 우리는 현실을 잊기 위해 과거에 탐닉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살아내기 위해 과거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픈 것들은 다 소리를 낸다고 하는데 아픈 과거들이 평화로운 풀벌레 소리와 함께 이젠 더 이상 뒤척이지 않고 편안한 잠을 청하길 바랍니다.

강제연행된 조선인의 모습

강제연행된 조선인의 모습

강제연행이란

1937년 중일 전쟁이 시작되자, 제국주의 일본(이하 일제)은 병력을 만주를 비롯한 중국으로 집중시켜야 했습니다. 그 뿐 아니라 많은 남자들이 군대로 끌려가야 했죠. 자연히 후방에서는 전쟁 물자를 생산할 노동력 부족을 겪게 되었습니다. 중일 전쟁 초기인 1939년, 일제는 노동자 “모집” 선전을 시작해 노동력을 보충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모집”되어간 사람들이 겪는 위험과 처참한 대우가 알려지면서 모집에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1942년부터는 관의 알선이라는 형식을 취해 노동력 동원에 나서지만 이 역시 어려움을 겪고, 전쟁 말기로 접어들면서부터는 무자비한 방법으로 노동력을 동원하기 시작합니다. “강제징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시기마다 제각기 다른 명칭으로 불리면서 진행이 되었지만, “강제”라는 어구에서 느낄 수 있듯이, 이렇게 끌려간 노동자들에겐 합법적인 근로계약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가혹한 노동과 착취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모두 어디로 간 걸까

여러 가지 주장이 제기되고 있지만 어느 것 하나도 확실한 게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상황 때문에 “강제연행”된 사람들의 정확한 숫자도 파악되지 않았고, 강제연행 되어 희생된 사람들의 수도 명확하게 알 수 없는 형편입니다.

강제연행의 역사를 들여다보니

사실 조선에서 실시된 강제연행은 중일 전쟁 발발 후 야기된, 노동력 부족을 보충하기 위한 일시적인 성격의 노동력 동원이 아니라 전체 식민지 시대를 통해서 일제가 조선에 대해 취했던 여러 가지 노동력 수탈 정책과 함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쟁 노동력 확보와 함께 황민화 (조선인의 2등 일본인화) 정책도 강력하게 추진되었습니다. 즉, 강제연행은 일제의 조선인 일본인화 정책과 침략 전쟁으로 부족한 노동력 확보라는 측면과 맞물려서 진행되었던 것입니다. 이는 제국주의의 일반적인 식민지 노동정책의 특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첫째, 강제 연행되었거나 전쟁 노동력으로 수탈을 당했던 노동자들은 2등 시민이었기 때문에 단순직에서만 일을 했고, 따라서 일제의 패망 후, 조선으로 돌아와도 기술자가 아니라 농민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둘째, 강제연행과 황민화가 시작되면서 일본어 사용이 강요되었지만, 대부분의 강제연행된 노동자들은 일본어를 전혀 사용할 줄 몰랐습니다. 즉, 일본어를 강요하면서도 일본어를 가르치는 (문맹률을 낮추는) 일은 하지 않은 것입니다.

위의 두 가지 사항은 일제 뿐 아니라 전 세계 제국주의 식민지 정책의 공통적인 특징(우민정책)이며 일제 또한 전형적인 침략제국주의였음을 잘 말해주는 사실인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허위고 명백한 사기였다

일제는 1938년에 국가총동원령을 내리고 1939년에 국민직업능력신고령과 국민징용령을 공포합니다. 곧 일본 기업가는 조선에서 점령군 당국의 지원을 받아 조선인 노동자를 모집합니다. 이는 표면상 지원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실제는 이와 거리가 먼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지극히 가난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했으며, 모집을 거부하면 요주의 인물 리스트에 올려놓았습니다. 임금이나 기간 상으로 계약조건에 있어서도 모든 것이 허위였으며 명백한 사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후 그들은 일본 내지와 조선의 젊은이들의 강제적인 모집을 대규모로 단행했으며, 이러한 동원에 거부하는 경우에는 재판에 회부되기도 했습니다.

조선인 강제연행은 먼저, 일본 내의 군수, 토목, 탄광, 등등의 사업소가 모집해야할 인원을 확정하여 장관 앞으로 조선인노동자의 [모집신청서]를 제출합니다. 장관은 그 내용을 심사하고, 후생성에 서류를 보내고, 후생성은 그것을 다시 심사하고 결정해서 조선총독부가 모집해야할 인원수를 통보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모집허가서를 받은 사업소는 노동 모집을 위한 관리를 조선에 파견합니다. 모집원은 조선총독부에서 지정한 도청으로 가고, 도청에서는 군, 면 단위로 모집할 지역을 허가합니다. 이 때 쯤이면 면사무소에서는 이미 도청, 군청으로부터 모집인원을 할당받아 경찰서장 또는 주재소 같은 면의 유력자의 협력 하에, 노무자 모집 포스터를 주요 장소에 게시합니다.

하지만 실제 그 포스터를 보고 응모하는 일은 극히 적었기 때문에, 면장은 할당된 인원을 지정된 일시까지 책임지고 확보하기 강제적인 방법을 동원합니다. 군이나 면사무소의 노무자 차출을 담당하는 관리는 일본서 온 모집원이 도착하면, 인원 확보를 위해 심야나 새벽에 남자가 있는 집을 급습하거나 밭에서 일하고 있을 때 마을에 트럭을 돌려 아무렇지도 않게 태우곤 했습니다. 또는 일을 하고 친구 집에 들러 늦게 귀가하는 도중에 잡혀 경찰에 연행되어 그대로 열차에 태워지는 등 본인이나 가족의 동의 없이 마구잡이로 할당인원을 확보했습니다. 때문에, 일본에 도착했을 때는 나막신을 신은 사람, 밭일 차림을 한 사람 등 복장과 모습은 가지가지였습니다. 물론 갈아입을 옷 따위를 가지고 있을 리 없었죠. 그것은 강제연행이라기 보단 인간 날치기라고 하는 게 적절할 것입니다.

하지만 전쟁이 길어질수록 이 같은 악랄한 ‘모집’ 형식으로도 엄청나게 많아지는 군수물자를 제조할 노무자가 부족해져갔습니다. 쇼와 17년(1942년) 2월 [반도인노무자활용에 관한 방책]에 따라 노동자를 조선에서 일본으로 이송하는 동안 도망칠 수 없도록 군인들의 감시 하에 이동하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그것도 부족해서 쇼와 19년(1944년)부터는 ‘징용’ 형식으로 조선의 젊은이들을 의사와 상관없이 강제로 일본의 노동현장에 끌고 가기 시작합니다.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들은 하루하루 염명할 수 있을 수준의 임금을 받거나 혹은 그나마도 받지 못한 채 아무런 혜택도 누리지 못하고 빈민수준의 생활을 하였으며 몸을 다치거나 병에 걸리면 노동가치가 떨어졌다하여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심지어 일제의 패망 이후에는 강제연행과 처참한 노동착취 사실을 은폐하기위해 집단으로 학살하기도 하였습니다.

참고
本多勝一, 『훗카이도 탐험기』
하마돈베츠 고교 향토회, 『아사지노 비행장에 대하여』
동아시아 평화마을 편집부, 『2001년 자료집』

글ㅣ2006 동아시아 공동워크샵 미디어팀ㅣ조일동, 조현상
편집ㅣ2006 동아시아 공동워크샵 미디어팀ㅣ조현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