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슈마리나이의 우류댐, 심에이선 철도공사를 말하다

훗카이도 슈마리나이에 위치한 우류댐 공사는 1938년에서 1943년 사이에 수력발전을 목적으로 건설되었습니다. 현재도 일본 전국에서 9번째로 큰 댐이며 건설당시에는 동양 1위의 댐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거대한 댐 공사에 일본 하류계급의 저임금 노동자와 강제징용된 조선인 노동자들이 동원되었습니다. 당초에는 1938년부터 1941년까지 3년간의 공사로 예정되어 있었고, 수력발전소의 건설로 유명한 하청업체에게 맡겼지만 전시였기 때문에 자재와 노동력이 부족하여 공정의 3분의 1이 진행되었을 때부터 공사를 직접 국영기업이 맡았고 공사 후반기로 갈수록 기계 대신 인력이 많이 동원되었습니다. 철도공사는 댐 공사 전에 시행되었는데, 댐으로의 자재 수송을 목적으로 건설되었습니다. 하청업체가 건설을 담당했고, 저임금 노동자들이 가혹한 노동을 강요당했습니다. 그러나 두 공사 모두 당시에 동원된 노동자의 숫자를 명백히 제시하는 자료는 없으며, 희생자 명단만이 남아있습니다.

강제노동하는 조선인의 모습                                  / 강제노동 공사현장 풍경

강제노동하는 조선인의 모습 /
강제노동 공사현장 풍경

희생자 명단을 물들이는 역사의 그늘

현재 幌加內村, 風連村의 埋火葬認許証, 幌加內村 광현사(光顯寺)의 過去帳과 위패조사에서 판명된 슈마리나이 공사장의 희생자는 총 204명입니다. 그 중 일본인은 168명, 한국인은 36명이고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중 본적이 판명된 한국인은 15명인데 이들의 출신지를 분석해 보면 경상북도 6명, 경상남도 2명, 충청북도 2명, 충청남도 2명, 전라남도, 경기도, 강원도가 각 1명씩으로 당시 한국의 8개 도(道) 가운데 전북을 제외하고는 출신지가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제기되는 의문점은 현재 당시 댐 공사에 수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자료인 댐 공사 진행 중에 작성된 노동자 자료에서도, 투입 된 강제연행자 수가 3000명 이상이었음에도 한국인 희생자 수는 36명에 그쳐 일반적인 사망자 비율보다 대단히 낮게 나타난 사실입니다. 당시 공사참여자의 증언을 종합해 보면 희생자의 수가 204명을 훨씬 넘을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댐 공사의 성질상 높은 곳에서 추락해 사망한 시신을 그대로 두어 콘크리트로 덮은 사실이 여러 곳에서 증언되고 있음에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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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명의 사무친 사연

그러한 의문을 뒤로하고, 기록이 남은 희생자 204명의 사망원인을 살펴보면 이상한 점은 더욱 많아집니다. 사망자수가 가장 많은 각기 증세는 비타민 부족을 비롯한 영양실조에서 기인하는 것인데, 이 병의 사망자수가 많다는 것은 가혹한 노동과 빈약한 식생활의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망원인이 ‘각기’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다른 원인으로 사망한 경우가 유족조사에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충심성 각기’로 사망원인이 표기된 한 일본인 노동자의 경우, 실제로는 공사현장에서 탈주 중 총살되었다는 사실이 함께 탈출한 동료의 증언에서 드러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밖에 평상적인 생활이나 노동 중에는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사인으로 표기된 사람들의 경우, 사고사나 집단구타, 총살 등을 감추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짐작케 됩니다. 사고사의 희생자가 많다는 것은 당시 강제연행 된 노동자들의 안전대책이 충분히 수립되어 있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이런 희생자들은 살해당했다고 얘기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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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노동 현장의 당시 모습 / 슈마리나이 댐의 현재 모습

참고
本多勝一, 『훗카이도 탐험기』
하마돈베츠 고교 향토회, 『아사지노 비행장에 대하여』
동아시아 평화마을 편집부, 『2001년 자료집』

글ㅣ2006 동아시아 공동워크샵 미디어팀ㅣ조일동
편집ㅣ2006 동아시아 공동워크샵 미디어팀ㅣ조현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