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호(평화디딤돌 대표, 한양대 교수)

PYH2015051508290001300_P2일제 침략의 역사적 상처와 한민족 이산의 아픔을 치유하고자 노력해 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질화된 남과 북의 상호이해와 문화통합을 위해 애써 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광복 70주년, 분단 70년을 계기로 이들이 한마음이 되어 ‘평화디딤돌’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었습니다.
평화디딤돌은 사단법인 ‘남북문화통합교육원’을 모태로, ‘한민족 다문화 삶의 역사 이야기’와 ‘동아시아평화마을’이 함께 뜻을 모아 만든 단체입니다. 남북 분단, 한민족 이산, 동아시아 평화를 주제로 각각 오랜 기간 다양한 실천 사업을 진행해 온 모임들입니다. 서로의 주제가 긴밀하게 결합된 문제이고, 그 해결을 위한 실천 역시 유기적으로 소통하며 함께 진행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남북문화통합교육원’은 1990년대 말의 참혹한 북한 기근을 계기로 북한 어린이들의 구호 활동을 하던 연구자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단체입니다. 중국 땅에서 어려움을 겪던 탈북 아동청소년들과 그 부모들이 남한 사회에서도 문화적 차이와 사회적 차별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현실을 보고, 통일부 하나원 내에 하나둘학교를 설립하였습니다. 그 후, 무연고 탈북청소년을 위한 늘푸른학교와 방과후 지역아동센터인 한누리학교, 무지개청소년센터 등을 설립하여, 이주배경 청소년들이 서로의 문화 차이를 이해하고 극복할 수 있는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였습니다.
최근에는 남과 북의 다양한 연령층 주민이 어울려 사는 남북 공동육아, 남북 여성과 노인들의 마을공동체 프로그램도 시도하고 있습니다. 북한 기근 연구에서 탈북 이주민에 대한 인도적 지원으로, 또 남북 문화통합 교육에서 다양한 이주민들과의 상호이해와 다문화 상생 프로그램으로까지 진화한 것입니다.

‘한민족 다문화 삶의 역사 이야기’ 모임은 다양한 국가, 언어, 문화 속에서 살아온 한민족 구성원들이 한 자리에 모여 각자의 삶을 이야기 하고 함께 듣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특히 한국 사회의 주류 역사에서 배제되고 소외되어 왔던 귀환 이주 한인(중국 조선족, 러시아 사할린동포와 중앙아시아 고려인 등)과 재일동포, 재미동포, 탈북 이주민, 그리고 남한주민들 중 실향민(월남 피난민 등)과 이념 갈등 피해자들이 각자 다른 나라와 체제에서 살아 온 다양한 삶의 경험을 함께 이야기 하였습니다. 이들은 서로 다른 조건, 다른 입장에서 살아온 타인을 이해하게 되고 자신의 아픔과 상처도 치유되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삶의 이야기’ 모임은 성별, 연령, 장애, 사회 집단 간의 편견과 고정관념을 극복할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도 활용될 것입니다.
해외의 비슷한 사례로는 독일의 동서포럼이 있습니다. 정치적 통일 이후 서로에 대한 편견으로 갈등하던 동서독 사람들의 마음의 통일을 위해 개발한 ‘삶의 이야기’ 프로그램은 독일 사회에서 차별받는 터키 이주민이나 폴란드 등 역사적 적대국 사람들과의 상호이해를 위한 프로그램으로도 확산되고 있습니다.

‘동아시아평화마을’은 1997년, 일본 홋카이도에서 ‘강제노동 희생자 유골발굴을 위한 한일 대학생 공동워크숍’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 후 18년간 매년 여름과 겨울,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연인원 1,500여명의 동아시아 젊은이들이 함께 땀 흘려 일하고, 함께 먹고 자고 놀고 이야기하는 집중적인 공동생활을 경험했습니다. 이들은 강제노동 희생자들의 유골발굴 작업 이외에도, 희생자 유족조사, 강제연행 체험자 조사, 재일동포의 인권과 민족교육, 일본군 위안부 문제, 이주민과 소수민족 차별문제 등을 직접 현장연구를 통해 공부하였습니다. 이렇게 역사적 진실을 함께 밝히는 통과의례 방식의 공동작업 경험은 ‘과거를 마음에 새기고, 현재를 몸으로 느끼며, 미래를 함께 열어가는’ 평화 공동체를 만드는 밑거름이 되고 있습니다.

‘평화디딤돌’을 구성하는 ‘남북문화통합교육원’, ‘한민족다문화 삶의 이야기’, ‘동아시아평화마을’은 각각 고유한 중심주제, 대상집단, 접근방법이 있습니다. 남북한의 분단현실과 문화통합을 주제로 탈북 이주민 중 특히 아동 청소년들을 교육하는데 주력하는 일, 한민족의 이주와 다문화 상황을 주제로 특히 장노년들의 삶의 역사를 기록하고 교류하는 일, 동아시아의 침략과 식민의 역사적 상처를 밝히고 치유하면서 관련국 청년들이 ‘진실과 화해’ 경험을 하도록 하는 일들을 각각의 모임과 단체가 오랜 기간 추진해 왔습니다. 이번에 ‘평화디딤돌’이란 이름으로 함께 힘을 합쳐서, 우선, 남북한․한민족․동아시아라는 상호 관련되는 주제들을 통합적으로 수렴하여 재구성하게 될 것입니다. 두 번째, 아동․청년․노년이라는 세대별 프로그램을 유기적으로 연계하여 구성하고자 합니다. 세 번째로, 교육․대화․워크숍이란 접근방법을 서로 공유하면서 역동적으로 활용하고자 합니다.

독일 베를린 거리의 보도블록 중에는 놋쇠로 씌워서 반짝이는 돌들이 있습니다. “걸림돌(쉬톨퍼슈타인)”이라고 합니다. 나치시대에 그 거리거리에서 잡혀가서 강제노동 수용소에서 희생이 된 사람의 이름과 희생사실이 새겨져 있습니다. 과거의 죄악과 희생의 상징물을 현재의 일상공간에 놓아 둔 것입니다. 앞만 보고 걷는 발걸음들이 무심하게 지나치지 말고, 걸려가라는 뜻으로 ‘걸림돌’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독일 사회내부의 자발적 각성과 치밀한 노력의 결과, 독일은 주변국의 신뢰를 얻어 통일할 수 있었고, 유럽지역에서는 EU와 같은 지역 공동체 질서가 자라날 수 있었습니다.

이에 비하여, 동아시아는 아직도 과거의 가해와 피해의 경험으로 단절된 벽 속에 갇혀있습니다. 광복 70년이 되는 오늘날에도 일제가 아시아 각국 사람들에게 남긴 상처는 아물지 않았습니다. 반인도적 범죄를 저지른 일본의 가해자 집단은 냉전의 틈바구니에서 제대로 정죄되지 않았고, 요즘에는 아시아 침략과 반인도적 범죄 사실을 부정함으로써 일본인의 긍지를 회복하겠다는 위험한 움직임이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노골적인 역사왜곡이 일본의 새로운 세대들에게 강한 설득력을 갖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오늘날 국경을 넘어서 인적교류와 문화적 접촉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나, 피상적인 접촉은 오히려 서로간의 편견과 고정관념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기 쉽습니다. 피해자 측의 집단주의적 적개심이 가해자 측의 무관심과 회피와 마주치게 될 때는 감정적인 분노로 폭발하기 쉽습니다.

동아시아에서 가장 첨예한 대립과 갈등은 한반도와 한민족 사이를 가로 지르고 있습니다. 일제 식민의 상처에 더해서, 분단과 내전, 냉전적 대치의 역사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동안 국내 정치 상황에 따라 간헐적, 주기적으로 되풀이되었던 반일, 반공의 구호는 자신의 피해 경험만을 특수화하여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벽을 쌓는 일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것은 반공의 논리로 강화되기도 했고, 배타적 국수주의로 표출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제 글로벌 시대에 국경을 넘는 다각적 교류와 이주의 물꼬가 트이고 경제적 상호 의존관계는 깊어졌지만 남북과 한일, 한중, 중일관계를 비롯한 동아시아 각 사회 간의 벽은 여전히 높습니다. ‘평화 디딤돌’은 과거의 상처를 딛고 서로 화합할 수 있도록 하는 디딤돌, 분단의 벽을 넘어 서로 통합할 수 있도록 하는 디딤돌, 국경을 넘나들며 차별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디딤돌, 이 대립과 갈등의 시대를 건너가도록 돕는 작은 실천의 디딤돌이 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