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있어, 여기 이름이 있어”

있어,
여기 이름이 있어

“있어, 이 이름 맞아. 여기 있어.”

“그럼 저게 형 유골 맞는 거지? 찾아갈 수 있는 거야?”

작년 추석, 파주 용미리 서울시립묘지 제2묘역에는 많은 참배객들의 발길이 이어졌다고 합니다. 그곳은 끌려갔던 3천여 km의 길을 되돌아 온 강제노동 희생자 유골의 안식처입니다. 희생자의 유족, 그 후손들뿐만 아니라 가족 묘지를 찾았던 많은 시민들이 역사적 희생자들을 위한 묘역 조성 소식을 듣고 자발적으로 추모의 발길을 이어갔다고 합니다.

이 묘역을 방문해야 할 장소로서 소개하는 일본의 시민단체 또한 있습니다. 한국과 일본의 시민들이 역사를 함께 공감하고 희생의 기억을 보편적 교훈으로 되새길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된 것입니다.

 

파주 용미리 서울시립묘지의 ’70년만의 귀향’ 묘역과 다음 뉴스펀딩 후원자 일동의 이름으로 전달한 화환의 모습 ⓒ 오승래

 

이 글을 보실 카카오 스토리펀딩 후원자님들을 포함한 많은 시민들의 관심과 동참 속에 작년 9월 115구의 홋카이도 강제노동 희생자 유골 귀향(70년만의 귀향)은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유골의 운구 뒤에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는 무엇이 있을까. 있다면 그것이 정녕 지금 이 순간에 필요한 책임 있는 행동인가.

‘강제노동 희생자 70년만의 귀환’이란 타이틀로 연재했던 마지막 글의 내용을 읽어 보았습니다. 다시 보니 아래와 같은 다짐의 문장을 남겼더군요.

“유골로 돌아온 희생자 몸에 남겨진 이야기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의 삶이 어떠했는지, 성격은 어떠했는지, 간혹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유골임에도 그 죽음 앞에 선 우리의 주제는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 우리가 살아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홋카이도 최북단에서 출발하여 서울까지 함께한 각자가 그러했습니다. 땅 아래 지층처럼 동아시아 곳곳에 묻혀있는 역사의 작은 파편들을 계속해서 발굴해 나가겠습니다.

이름 없이 스러져간 한 사람 한 사람을 기억할 수 있는 무언가를 고민했습니다.

일본 홋카이도 니시혼간지 삿포로 별원에 안치되었다 귀향한 강제노동 희생자 명단을 동판 새겨 넣었다. ⓒ 오승래
 
이름을 남긴다는 것

발굴 중에 유골과 마주칠 때면 죽어서 내 이름 석 자가 몸 위에 남아있다는 것 자체로 굉장한 축복임을 느낍니다. 희생자의 행적을 다루는 일, 유족과의 만남 등, 역사 속 개별 기억을 살려내는 모든 과정은 이름을 찾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신O옥’

눈 앞에 두고 지나칠 뻔한 이름입니다.

작년 9월 19일, 서울 시청 광장에서 열린 홋카이도 강제노동 희생자 장례식에 앞서 유족 분들의 참석을 확인하는 자리였습니다. 전달할 물건이 있어 장례식 준비를 하는 무대로 갔습니다. 준비하시는 모든 분들은 정신없이 분주한 상태였기에, 제가 그 자리에 대신 서있게 된 것입니다.

유족석 앞에 섰습니다. 홋카이도로부터 여정을 함께한 유족, 이름 석자를 자신의 발로 확인하러 오는 유족 등에 온 신경이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그때, 몇 분의 유족께서 텔레비전에서 ’70년만의 귀향’의 소식을 보고 왔다며, 큰 아버지, 형, 외할아버지 등의 이름을 명단을 통해 찾기 위해 다가오셨습니다.

그중 모자를 눌러쓴 한 할아버지께서 제게 한글로 된 조선 이름과 창씨개명한 일본 이름을 반복적으로 말하며 찾아보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찾을 수 있는 한글 이름을 반복해서 찾아보았지만 115명의 강제징용 희생자 명단에는 없었습니다.

“어르신 명단에 없는 것 같아요.”

할아버지는 “우리 어머니, 아버지 눈 못 감고 돌아가셨어” 말씀하시며, 1944년 11살 나이에 헤어진 형을 애타게 찾고 싶어 하셨습니다.

“OOOO 마사오..”

창씨개명된 일본 이름을 몇 번이고 말씀하셨지만 일본어를 모르는 저는 할아버지께 명단을 직접 보여드렸습니다.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있어. 여기 맞아” 하시며 일본 이름을 단번에 알아보셨습니다. 명단 속 한글 이름은 공란으로 비어있었고, 창씨개명한 일본 이름, 생년월일, 본적이 적혀 있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종이에 한글 이름, 일본 이름, 생년월일, 본적을 옮겨 적어주시고는 감격한 마음으로 두 손에 잡은 종이를 입에 맞추고 볼에 비비며 70년 만에 찾아온 형을 고요히 만나셨습니다.

희생자 명단에서 단번에 창씨 개명한 형의 이름을 찾아내고 눈물을 훔치시는 유족 ⓒ 황미정

 

“저게 형 유골이여? 찾아갈 수 있는 거야?”

저는 할아버지 물음에 답변을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대신 “내일 파주 묘지에 안장시키러 갈 거예요”라고 했더니 고개를 끄덕끄덕하셨습니다. “돈이 얼마야?”라고 물어오셨습니다. “돈 안 내셔도 돼요”라고 했고, 할아버지와 나는 그 어떤 배경설명 없이 그렇게 짧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다음날 일정을 재차 확인하셨습니다.

 

“어르신 내일 아침 9시 대한문 앞으로 꼭 오세요.”

다음 날 버스를 타신 것까지만 확인하고 여러 가지 진행 준비로 대면하거나 대화를 나눌 수는 없었습니다. 모든 행사가 끝나고 보니 언제 찍었는지 저의 휴대폰 사진에 할아버지의 모습이 담겨 있었습니다. 할아버지의 고요하지만 감격스러운 순간을 내심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해를 넘겨 새로운 계획이 제안되었습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일상 공간 곳곳에 역사적 기억의 파편들을 디딤돌로 놓자는 것이었습니다. 그 시작으로 홋카이도에서 모셔온 115분의 희생자 중 서울 지역을 출신지로 두고 계신 네 분의 이름과 사망 연월일, 강제징용 등의 행적을 디딤돌에 새겨, 각자 거주하신 장소 인근에 놓기로 하였습니다.

이른바
‘평화 디딤돌’ 놓기의
제안이었습니다

디딤돌 제작을 위한 네 분의 인적 사항을 재차 확인하고 계획을 실행해가던 중, 그날 시청에서 뵈었던 어르신이 생각나 당시의 기억을 뒤적여 보았습니다.

순간 ‘그런데 어느 분의 유족이었지?’라는 의문이 들어, 당시 현장에서 받아 적어 놓았던 이름과 연락처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무심하게도 한참이 지나서야 나온 메모장에는 놀랄만한 글자들이 적혀있었습니다. 다름 아닌 서울에 놓기로 한 이름 중 한 분의 성함, 본적지와 정확히 일치하고 있었습니다.

‘신O옥’

생활 주변에 역사의 기억을 심어보고자 했던 우리 스스로의 기억 속에는 정작 잊혀있던 셈입니다. 그저 스스로가 부여한 의무에 몰두해 새기고 있던 동판 위 이름 석 자의 의미를 재차 깨우는 순간입니다.

이름만이 새겨지고 유족을 포함해 그를 둘러싼 모든 기억은 사라졌던 것입니다. 다행이다 싶어 조심스럽게 어르신이 남긴 연락처로 걸어보았습니다.

“어르신, 기억나시는지요. 북해도에서 형님 모시고 온..”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수화기 너머로 반가움이 전해졌습니다.

“어이구, 네네. 감사합니다. 내가 그 후로도 두 번씩이나 형님 보러 용미리 갔다 왔어요..”

“네, 어르신. 그땐 정신이 없어서..이야기가 듣고 싶어 다시 전화드려 보았습니다. 여기 기록에 적힌 성함으로 ‘신O옥’ 형님이시고..본적지가 경성부 성동구..”

반가움에도 역시 이름 이야기가 먼저 화두에 올랐습니다.

기록만을 따라 기억을 새기려 했던 오류 역시 드러났습니다. 희생자의 출신과 성장지는 전혀 다른 장소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딛고 있는 생활의 터전은 하루가 멀다 하고 바뀌고 뒤집어지길 반복합니다. 서울을 비롯한 도심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기억의 연속은 시간이 갈수록 재빨리 단절될 것입니다. 이름 하나만을 보고 역사의 맥락으로 맞닿을 수 있을지, 이것이 정서적으로 공유가 될 수 있을지, 강한 의문이 남는 조건 속에 살고 있습니다.

비단 70여 년 전 강제노동 희생자의 문제만은 아닐 것입니다. 여기에 누군가 있었지만 그저 사라져버린 이름은 이 글을 읽는 본인을 포함 모두의 이야기가 될 수 있습니다.

‘평화 디딤돌’은
이러한 고민에서 출발합니다

가장 가까운 곳마다 기억의 지도를 이어보려 합니다. 한 가지 사례로 이 글을 마치겠습니다.

독일 베를린의 거리에는 ‘걸림돌(Stolpesteine)’이라는 돌이 있습니다. 조금 더 풀이하자면 ‘발을 헛디디게 만드는 도로 위의 포석(Stolpern-Pflastersteine)’정도의 의미로 통합니다.

버스정류장과 지하철 입구에 반짝이는 놋쇠로 된 보도블록이 놓여 있습니다. 그 돌 하나하나마다 그 지역에 살다가 나치에 의해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죽어갔거나 강제 퇴거된 유태인 한 명 한 명의 개별 이름, 생년월일, 그 후의 운명 등이 새겨져 있습니다.

유태인들만이 희생된 것은 아닙니다. 독일인 사회주의자, 동성연애자, 집시, 마지막으로 양심적인 기독교 신자들까지 희생되었다고 합니다. 그 희생자들이 살던 일상의 장소, 그 거리거리마다 시민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반짝이는 작은 돌이 바로 ‘걸림돌’입니다.

90년대 중반, 나치 독일의 만행과 그 희생의 역사를 부정하는 평범한 독일 할머니를 만나 충격을 받은 한 독일인 조각가가 ‘기억과 책임’을 일깨우고자 희생자들의 이름과 사망 연월일, 사망 장소 등을 동판에 새겨 그들이 살던 거리에 역사적 희생의 증거로 박아 놓기 시작하였습니다. 독일 전역에 이미 4만 8천 개의 ‘걸림돌’을 놓았고, 지금도 꾸준히 그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고 합니다.

베를린 샤를로텐부르크(Charlottenburg) 거리에 박혀있는 걸림돌(Stolpestein)의 모습. 위에는 희생자의 이름(Bertha Fiedler)과 태어난 연도(1867년), 사망년월일(1942년 8월 17일)이 새겨져 있다. 그 외에 희생자의 역사가 적혀있는데, 이곳 베를린에서 체코 테레친(Terezín)의 강제수용소로 끌려가 수용된 연도와 일자(1942년 7월 30일)가 새겨져 있다. 수용된 지 보름이 조금 넘은 때에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 OTFW, Berlin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살면서도 전혀 다른 역사 속에 살고 있던 한 개인과의 만남이 새로운 역사의 지도를 그려가는 이십여 년의 시간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그 역사는 바로 나와 몇 걸음 옆의 자극에서 시작됩니다.

편하게 내디뎌왔던 내 발 밑 언저리에 존재하였으나 그 이름 하나 못 남기고 지나갔던 한 사람, 한 사람의 역사가 사실의 ‘증거’로 기록되어 간 사례를 이 곳에서 실현하고자 합니다.

‘평화 디딤돌’.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