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포로시내

 

삿포로(札幌)

니시혼간지 삿포로별원 → 모이와 희생자의 비 → 홋카이도 박물관 →홋카이도 개척촌

1869년 도시건설이 시작된 이래 바둑판처럼 구획되어 현대적인 도시의 삶을 즐길 수 있는 삿포로. 그러나 이러한 삿포로가 탄생하는데는 일제강점기 강제노동 희생자들의 역사가 숨어있습니다.

당시 삿포로시에는 국철 삿포로, 육군북부군사령부지하호공사, 치자키구미 삿포로(地崎組 札幌) 등 조선인연행사무소가 14개 이상 존재했으며, 그 중 치토세 비행장 건설공사에는 긴급한 군(軍)공사로 취급되어 비행장공사에 시설대 1,157명, 치자키구미(地崎組) 소속 노무자 2,000명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일본의 패전으로 비행장이 완성되지 않은 채 공사는 중단되었으나 활주로와 유도로는 완상된 상태로 현재 이 비행장은 육상자위대가 사용하고 있습니다. 또한, 삿포로시의 수도와 전력공급을 위해 정수장과 발전소가 지어졌으며 조선인 강제노동자가 동원되었습니다.

또한, 아이누어로 ‘건조하고 넓은 땅’이라는 뜻의 삿포로는 일본인이 아이누인의 땅인 홋카이도를 침략한 역사를 어떻게 ‘개척’이라는 이름으로 기록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기념관과 관광지가 있습니다.

이러한 삿포로에서는 4곳을 둘러보려합니다. 강제노동 희생자 유골이 모셔져 있었던 니시혼간지 삿포로별원과 조선인 강제노동의 사실과 희생을 기록하고 있는 모이와 희생자 기념비는 삿포로 서쪽에, 일본 본토로부터의 관점에서 개척의 땅임을 자랑하는 홋카이도 박물관과 홋카이도 개척촌은 동쪽에 있습니다. 4곳을 모두 돌아보는데 5시간이 걸렸지만 삿포로역을 중심으로 하코다테 본선을 타고 도시를 가로질러 가다보니 도시 전체가 눈에 들어옵니다. 삿포로 시내 주요 관광지와 멀지않으니 하루에 한 두곳 정도는 방문하기를 추천합니다.

 

니시혼간지 삿포로별원(西本願寺札幌別院)
▲정문에서 본 니시혼간지 삿포로별원

유골우류품정리부

니시혼간지 삿포로별원의 정식 명칭은 일본불교 정토진종(浄土真宗) 혼간지파(本願寺派) 홋카이도교구 삿포로별원입니다. 이곳에는 강제노동 희생자분들의 유골이 모셔져 있었습니다.

이곳에 보관되어있던 ‘조선인노무자순직자명부’(1946년)등의 유골명부와 스가와라구미(菅原組)의 ‘유골보관 의뢰서’(1946년)등의 기록에 따르면, 일본 패전 직후인 1946년 5,6월 무렵 치자키구미(地崎組)를 중심으로 홋카이도 토목기업 공사에 강제동원 되었고, 그 중 사망한 조선인 67위의 개인별 유골을 임시로 별원에 모셨습니다.

‘유골유류품정리부’(1969년) 에는 치자키 구미에서 사망한 조선인 등 101위의 이름, 연령, 사망연월일, 소속사 본적지가 기재되어 있었습니다.

혼간지파 스님이자 평화운동가인 도노히라 요시히코 스님의 저서 <유골:말을 걸어오는 생명의 흔적>에 따르면, 당시 기록을 정리했던 삿포로별원 직원은 ‘반드시 유골을 유족에게 전해줄 날이 올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정성껏 작성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유골들은 1969년 5월~ 2015년까지 총 4차례의 합골과 분골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처음엔 회사의 요청으로 납골단의 통합정리를 위해 나뉘어져있던 유골이 합쳐지고, 두번째는 경영난으로 회사의 납골단을 별원자체의 합골당으로의 합골 요청에 의해 일본의 다른 유골들 위로 쏟아부어집니다.

세번째는2002년 말 이 사실을 알게 된 도노히라 요시히코(殿平善彦) 스님은 이 상황의 문제점을 알리고 합골당에 쏟아진 유골을 다시 별도로 구별하기 위해서 세 개의 큰 항아리에 옮겨담게됩니다. 마지막으로 2015년 한국으로의 봉환을 위해 유족들의 합의를 얻어 한국지역 출신자로 추정되는 약 70% 분량의 유골을 다시 나누어 한국으로 봉환해 파주시립묘지에 안치했습니다.

삿포로별원에서 보관하고 있던 유골 항아리에는 유류품이 몇 점 있었는데, 만년필 뚜껑, 손목시계 끈 등도 있었다고 합니다.

▲삿포로별원 지하1층의 납골당

삿포로 별원의 지하 1층에는 북한이 고향인 분들의 강제노동 희생자 유골이 아직 모셔져 있습니다. 남과 북이 협력해 이분들도 하루빨리 고향으로 돌아갈 날이 오길 바래봅니다. 그리고 삿포로별원에 사전에 요청을 통해 허락을 받으면 분향을 할 수 있습니다.

▲강제노동 희생자를 기리는 기림동판

삿포로별원 정문에서 봤을 때 오른쪽 입구에 넓은 대리석위에 동판이 있는데, 이것은 강제노동 희생자를 기리는 기림동판 ‘평화디딤돌’입니다.

삿포로별원에 모셔져있던 유골 봉환 후 이들을 기리기 위해 2016년에 만들어진 이 동판에는, 홋카이도 탄광, 철도, 도로, 항만, 비행장 건설에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다는 사실과 희생자의 명단이 빼곡히 적혀있습니다.

삿포로역에서 도보로도30분밖에 안걸리는 곳이니 시내를 돌아보다가 들러 강제노동 희생자를 위해 잠시나마 추모의 묵념을 하고 어떤 사람들이 기록되어있고 어떻게 희생되었는지 동판을 직접 읽어보는 것도 뜻깊은 여행이 될 수 있겠습니다.

〒060-0003 北海道札幌市中央区北3条西19丁目(Hokkaidō, Sapporo -shi, Chūō-ku, Kita 3 Jōnishi, 19 Chome) 연락처  +81 11-611-9322 교통 삿포로 에키마에(札幌駅前)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키타 5죠 니시 20쵸메 정류장에서 하차 후 도보 4분으로 총20분거리

구글지도 https://goo.gl/maps/wi45FVdqk4G2 

 

모이와 희생자의 비(藻岩牲者)

▲모이와 희생자의 비 전체 모습

▲홋카이도 전력

 

1994년 6월에 건립된 조각 작품. 네 개의 곡괭이 위에 소중하게 물을 받는 듯한 모습의 모이와 희생자의 비는 모이와 발전소 및 정수장 건설 공사의 희생자를 기리기 위한 동상으로 아래에는 자세한 내용을 적은 석판이 있습니다.

삿포로시에 상수도 정비가 시작된 1936년 홋카이도수력전기에서 모이와 정수장 건설과 이와이 발전소를 건설했습니다.

모이와 발전소는 이전에 지었던 다른 수력발전소와는 차원이 다른 대규모 공사로 그 어려움과 고난은 극한의 경지였습니다.

발전소와 정수장의 건설에 많은 수의 인원이 강제로 동원되었고 판명된 희생자가 3년간 34명이라고 합니다.

이 모이와 희생자의 비는 모이와 발전소와 정수장 그리고 미스마이의 모이와댐으로부터 시작되는 지하수도 공사를 위해 희생된 타코베야 ·신요베야 등의 노동자(일본인 ·조선인)를 위한 추도와 그 역사적 사실을 전하기 위해 ‘홋카이도 모이와발전소 건설공사희생자의 비를 건립하는 모임’에서 건립하였습니다.

▲조각상 아래 있는 설명비문      

<모이와 희생자의 비>

삿포로 시민의 문화생활의 원천이 되는 물과 전기를 공급하고 있는 북전모이와 발전소와 삿포로시 모이와 정수장의 건설공사는 1934년에 착공하여, 발전소는 1936년, 정수장은 그 이듬해에 완성되었습니다.

이 두 시설로 흘러들어가는 토미히라가와(富平川)의 물은, 미스마이 (簾舞)댐에서 지하를 달려 수로를 통해서 모이와산의 산허리에 있는 발전소에 이르고 거기서 한 번 더 후시미(伏見)에 있는 모이와 정수장으로 보내지는 장장 13km여에 이르고 있습니다.

정수장은 삿포로시 직영 공사로 진행되었습니다. 발전소는, 북해수력 전기주식회사 (현 홋카이도 전력의 전신 중 하나)가 발주 원청이며, 카지마구미(鹿島組)(현 카지마건설)와 이토구미(伊藤組)가 원청, 약 40여개가 하청을 받아 건설했다.

발전소에서는 ‘타코베야’, ‘신요베야(信用部屋)’, ‘카요이(通い)’ 노동자들 약 4천 명이 종사하였고, 희생자는 현재까지 적어도 80명이 넘으며, 그 중 사망자는 조선인 5명을 포함 34명을 기록하고 있습니다(추정 포함).

 

이들 노동자의 대다수는 전국 각지에서 생활을 빼앗긴 일본인이며, 일본 식민지 지배에 의해 먼 이국의 땅으로 건너오지 않으면 안되었던 조선인입니다. 그 중에는 중개업자에게 속아서 타코베야에 팔려오고, 가혹한 노동을 강요당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하청의 약 반은 타코베야로, 조선인 타코베야는 3개동, 조선인 신요베야가 5개동이 있었습니다.

타코베야 노동자는 감금당한데다가 혹사당하고, 쇠약해져도 약이 공급되는 경우는 드물었으며, 때로는 체벌이 가해지고 어떤 이는 생매장되었고, 어떤 이는 학살당하는 등, 잔혹하고 비인도적인 상황에 처해졌습니다. 또한 신요베야 노동자도 안전 대책이 불충분했던 이유로 낙반 사고 등으로 생명을 잃게 되었습니다.

 

먼 고향을 생각하며, 피곤하고 지친 끝에 지금도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채 어둠에 매장되어있는 희생자의 원통함을 생각할 때 그 원인과 책임 소재의 해명을 더욱 추구해 갈 필요가 있습니다.

이에 우리들은 공사에 관계되었던 노동자의 노고를 기리며, 많은 시민의 동참과 모금으로 이 비를 건립하고, 희생자의 추도와 함께 다시는 이러한 인권 무시가 행해지는 일이 없도록 그 사실을 후세에 전해 이러한 역사를 마음에 새기고 책임을 다하고자 합니다.

1994년 6월 11일

‘북전 모이와 발전소 건설공사 희생자의 비를 건립하는 모임’

〒005-0031 北海道札幌市中央区南31条西

10丁目-1-8 クルーザーバレーサッポロ ビラミナミ31의 맞은편 (Hokkaidō, Sapporo-shi, Minami-ku, Minami 31 Jōnishi, 10 Chome−1−8) 교통 정확한 위치는 나오지가 않아 맞은편 건물을 기준으로 설명하면 ‘쿠르자바레 삿포로 피라미나미’ 31 건물의 바로 맞은 편 첨탑 앞에 있습니다. 자동차로는 삿포로역에서도 삿포로별원에서도 약 15분 거리이나 대중교통으로는 약 1시간에 여러 번 갈아타야하는 번거로움이 있습니다.

구글지도 https://goo.gl/maps/5DjQHtZ4K2A2

 

홋카이도 박물관(北海道博物館)


▲홋카이도 박물관의 전경

▲ 1층에 전시된 코끼리 전신골격           

홋카이도 박물관은 ‘북동아시아 속의 홋카이도’, ‘자연과 사람과의 관계’를 콘셉트로 홋카이도의 자연, 역사, 문화를 소개하고 있는 종합박물관입니다. 홋카이도에 서식했던 2종류의 코끼리의 전신 골격 전시로부터 시작되는 종합 전시관은 홋카이도의 역사와 문화, 아이누 민족의 문화, 홋카이도의 현재, 홋카이도의 생태계 등의 5개의 테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종합전시 안내판에는, ‘홋카이도는 일본 북쪽 끝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북동아시아라는 넓은 시야에서 보면 다른 모습이 보입니다. 또한, 자연과 사람을 각각 별도의 존재로 이해하기 쉽지만, 자연과 사람과의 관계를 알게 됨으로써 새로운 모습이 보입니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박물관을 홋카이도의 선주민이었던 아이누인의 입장에서 보면 어떻게 될까요? 일본의 ‘개척’으로 인해 자연과 함께 수렵생활을 하며 자연에서 받은 것에 감사하고 자연과 함께 숨쉬던 아이누민족의 삶에서, ‘야만’하다는 이유로 수렵 및 어업도 언어도 문화도 금지당한 채 울창한 삼림을 논밭으로 개간할 수 밖에 없는 삶으로 바뀌어 버리고 맙니다.

▲메이지~쇼와초기의 철도망

위 사진은 메이지 시대~ 쇼와 초기의 철도망입니다.

왼쪽 아래 오타루부터 시작되는 짧은 빨간색 실선이 1885년도의 철도입니다. 그때까지 단 1개 밖에 없었던 철도가 1930년까지 겨우 45년만에 홋카이도 전역으로 철도가 깔린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풍부한 물자 수송을 위한 홋카이도 전역의 삼림, 탄광 등 수탈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이 당시의 아이누 선주민을 수탈하는 방식은 바로 조선인을 수탈하는 방식의 예행연습이 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교역초기의 환영의례에서 추후 아이누인의 통치수단이 된 오무샤

박물관 설명문에도 아이누 민족은 지역별로 다양한 문화가 존재했으며 의복 문양들도 다양하게 존재했다고 설명하고 있으나 현재 그 문화가 남아있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 위의 사진이 말하듯 오른쪽 한편에 깔개도 없이 빽빽이 앉아있는 아이누인들과 이와 대조되는 다른 이들의 모습이 그 이유를 보여주는 듯합니다.

전시물 중에는 의아하게 만드는 설명문도 있습니다. ‘아이누 사람들’ 이라는 설명문에는 ‘아이누인들은 살던 땅과 생활 방식을 잃어버리고 고생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난을 극복하고 후에는 뛰어난 인물이 태어났습니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아이누 사람들 설명판 

▲각 지역 노동 작업별 죄수의 수와 사망자 수

그리고 2층 ‘우리들의 시대로’라는 테마의 ‘아시아 전쟁과 홋카이도’라는 세션 설명문에는 ‘탄광이나 토목 공사에 조선인들이 강제징용되었습니다’라고 한 줄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토의 죄인이 홋카이도로 와서 어떻게, 얼마나 많이 죽었는가는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인 강제노동 희생자는 얼마나 있었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희생되었는지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아름다운 자연과 현재의 발전된 홋카이도의 모습으로 마무리되는 홋카이도 박물관은 어떤 관점이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를 읽어 낼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004-0006 北海道札幌市厚別区厚別町小野幌53-2 (53-2 Atsubetsuchō Konopporo, Atsubetsu-ku, Sapporo-shi, Hokkaidō) 교통 JR 신삿포로 역 또는 JR 신린코엔 역에서 버스(新22 ‘카이타쿠노무라 행’) 승차 홋카이도 박물관 정류장에서 하차 관람시간 9:30~17:00(5~9월)/9:30~16:30(10~4월) 폐관 30분 전까지 입장 가능 휴관일 매주 월요일 및 연말연시(12월 29일~1월 3일) 요금 성인 ¥600, 대학생․고등학생 ¥300
Web http://www.hm.pref.hokkaido.lg.jp/kr/
구글지도 https://goo.gl/maps/NeLnURFHGHL2

 

홋카이도 개척촌(北海道開拓村)


▲홋카이도 개척촌 입구

홋카이도 개척 100주년을 기념하여 개설된 무려 542,000㎡의 야외 박물관으로, 메이지부터 쇼와 시대에 걸쳐 개척 시대에 건축되었던 홋카이도 각지의 주요 역사적 건축물 총52동을 각지로부터 이축 및 복원하여 보존하고 있습니다.

여름(4월 중순~ 11월 말)에는 마차 및 철도, 겨울(12월~3월 토, 일 및 축일, 삿포로 눈축제 기간 중 평일)에는 말 썰매로 시설 전체를 둘러볼 수 있습니다.


▲여관 건물과 내부 판매대

건물을 하나씩 다 보려면 하루 종일 돌아도 모자랄 것 같은 넓은 부지에, 영화에서나 보았을 것 같은 근대식 일본풍의 건물들이 신기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 엄색 기업 건물과 내부 모습

그러나 개척시대 이전에 살고있던 아이누 선주민들이 내몰리고 지어졌을 이 위풍당당한 근대식 건물의 위엄들로부터 이름 그대로 철저히 본토의 개척자의 눈으로만 그려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004-0006 北海道札幌市厚別区厚別町小野幌50-1 (50-1 Atsubetsuchō  Konopporo, Atsubetsu-ku, Sapporo-shi, Hokkaidō)
교통 JR 신삿포로역에서 버스(新22 ‘카이타쿠노무라 행’) 승차, 카이타쿠노무라 정류장 하차 관람시간 9:00~17:00(5~9월) / 9:00~16:30(10~4월) 폐관 30분 전까지 입장 가능 휴관일 매주 월요일 및 연말연시(12월 29일~1월 3일) / 5~9월은 휴관일 없음 요금 성인 ¥800, 대학생․고등학생 ¥600 마차철도 및 말썰매 성인(15세 이상) ¥250 어린이(3~14세) ¥100

Web http://www.kaitaku.or.jp/
구글지도 https://goo.gl/maps/h3CMR3og5FG2

 

pdf 파일 다운로드 : 평화디딤돌_1234시간여행자가이드북_북해도-1삿포로p.pd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