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름에도 산 정상에 쌓여있는 눈을 볼 수 있는 다이세쓰산

 

히가시카와&아사히카와(東川町& 旭川市)

다이세츠 유수공원 → 중국인 순난열사위령비 → 북진 기념관 → 카와무라 카네토 아이누 박물관

히가시카와와 아사히카와는 아이누어로 츕쁘베츠로 ‘아침 해가 뜨는 동쪽 강’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홋카이도의 중앙 카미카와(上川)지방의 거의 중앙에 위치하고, 웅대한 다이세쓰산에 둘러싸여있으며 이시카리카와(石狩川)와 많은 지류가 합류하여 비옥한 분지가 펼쳐지는 곳입니다. 바로 이러한 지형으로 인해 강제노동 희생자들이 생기게됩니다.

다이세쓰산에서 흐르는 차가운 물을 두 도시의 농업에 이용하기 위한 히가시카와에 발전소와 유수지 건설을 위해 조선인과 중국인 강제노동자들이 동원되었고 혹독한 환경으로 짧은 기간에 많은 이들이 희생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같은 환경에 처했던 두 나라의 강제노동자들에 대해 이 지역 사람들의 대우는 상반되었습니다. 그리고, 지역에 있었던 같은 역사 사실에 대해서도 서로 다른 관점이 존재했습니다.

또한, 아이누 선주민의 집단 거주지였던 아사히카와는 1891년 나가야마(永山)에, 1892년 히가시아사히카와(東旭川)에 둔전병(屯田兵)이 정착하여 1893년에 둔전병과 그 가족들의 아사히카와촌 (旭川村)이 건설됩니다.

이후 하코다테선(函館線) · 소야선(宗谷線) · 세키호쿠선(石北線) 등 철도 개통과 국토의 정비로 교통의 요충지가 되었고, 농림 산물의 집산지이자 제지 · 목공 · 펄프 공업이 발달하여 홋카이도 제2의 도시로 성장하였고 그만큼 선주민 아이누 민족은 그 설자리를 잃어버렸습니다.

각각의 도시만으로도 충분히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함께 비교해서 보면 더욱 그 의미가 드러나게 됩니다. 히가시카와에서는 강제노동의 역사를 담고 있는 다이세쓰 유수공원과 중국인 순난열사위령비를 아사히카와에서는 개척자와 선주민의 역사를 담고 있는 북진기념관과 아이누기념관으로 4곳을 함께 보고자합니다.

다양한 자연 풍광과 볼거리 풍부한 홋카이도 중부에서 역사에 관한 일본의 새로운 면을 보고 싶다면 이 코스를 강력히 추천합니다.

 

히가시카와쵸(東川町)

한여름에도 녹지 않은 눈이 쌓여 있는 다이세쓰산(大雪山대설산)이 저 멀리 보이는 히가시카와는 인구 약 8,000명 정도의 가미카와분지(上川盆地)가 있는 농업이 발달한 곳입니다. 또한 일본 최대의 자연 공원인 다이세쓰산 국립공원(大雪山国立公園), 천혜의 자연 환경과 더불어 풍부한 농업 지대가 매력적인 여행 포인트로 유명한 도시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때문에 히가시카와는 잔혹한 제국주의 국가의 폭력과 강제노동의 아픔의 역사가 서려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수온을 높이는 유수지(왼쪽)과 유수지의 물이 농업용수로 활용되고 있는 논(오른쪽)

일본 제국주의 시기 원활한 농업 및 지역 발전을 위해 히가시카와에는 1940년대 초반 수력발전소인 에오로시(江卸) 발전소와 댐, 수온 상승을 위한 유수지(遊水池) 건설이 시작됩니다.

▲에오로시 댐

군사 도시인 아사히카와에 전력을 공급하기 위해 다이세쓰산 국립공원에서 나오는 수많은 지류가 합쳐서 흐르는 츄베쓰카와(忠別川)를 막는 댐을 건설 공사를 실시했습니다.

이렇게 모아진 물은 하류에 세워진 댐으로 이동해 100m정도를 낙하하면서 전기를 만들었으며 이 전기를 공급, 사용하기 위해 발전소가 건립되었습니다.

그리고 츄베쓰카와에서 흐르는 물은 다이세쓰산의 눈이 녹아 내려온 것으로 온도가 매우 낮아 농업에 사용하기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물의 온도를 높여서 공급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를 위해 건설된 것이 바로 유수지입니다. 유수지는 저수지처럼 물을 가두어 수온을 오르게 한 뒤 흘려보내 농업에 사용하기 적합하도록 만드는 기능을 한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히가시카와는 전쟁기에 군사적, 산업적으로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였으며 현재까지도 훌륭한 쌀 생산지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습니다.


▲히가시카와 발굴지의 발굴전 모습(왼쪽)과 소형 포크레인으로 초기작업을 하는 모습(오른쪽)

그러나 이러한 공사에 조선인 1,170여 명, 중국인 338명이 동원되었습니다. 그 중에 88명의 중국인이 희생되었고, 조선인 희생자 수는 알 수 없었습니다. 11개월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중국인 88명이 희생되었다면 그 공사의 혹독함은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었습니다. 전쟁 말기에 시행된 대규모 공사에 투입될 인력과 중장비가 부족했던 일제는 조선인, 중국인들을 공사 현장에 투입했던 것입니다.

2013년 8월17일~ 23일까지 홋카이도 에오로시 발전소와 히가시카와 유수지 건설 공사 중 희생당한 조선인 유골 발굴 조사를 실시하였습니다. 사망한 조선인은 겨울에 근처 공동 묘지 입구에 매장되었다는 제보에 따라 조사를 실시하였는데 그 지점은 과거 공동 묘지 입구에서 아스팔트가 깔린 도로 밑이었습니다.


▲한-일 대학생 및 시민이 모여 함께 발굴하는 모습(왼쪽)과 매장지의 흔적(오른쪽)

증언자들은 1945년 겨울에 희생자를 사각형 나무 상자에 입관하여 눈 구덩이를 파고 묻었다고 비교적 당시 상황과 지점을 상세히 설명하였습니다.

이를 근거로 20mx3m 정도의 아스팔트를 걷어내고 조사를 한 결과 묘지 입구 도로 가운데에 나무 상자의 흔적은 찾았으나 유골을 찾지 못하였습니다. 전쟁 후 눈이 녹아 나무관이 노출되었고 뚜껑이 벗겨져 있었다는 증언 등을 봤을 때 유골은 짐승이나 자연에 의해 훼손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조선인 희생자의 숫자는 알 수 없는 반면, 중국인 강제노동 강제동원 인원과 희생자의 상황 파악이 명확히 밝혀져 있었습니다. 사실 1972년 중일간의 국교 수립이 되면서 당시 중국 정부가 일본에 강제징용 사과 요구와 함께 위령비 건립을 요구했지만, 한국 정부의 요구는 없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발굴이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은, 2008년 곤노 노부오 변호사를 중심으로 이 지역의 조선인 강제연행·동원의 역사를 발굴하는 모임이 발족되어, 지역 사료 조사 및 증언 채록과 함께 징용 생존자의 인터뷰를 하기위에 한국으로 오기도 했습니다.

하가시카와의 이러한 활동이 더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은 바로 지자체에서 직접 해당 지역의 조선인 강제동원 사례를 조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앞으로의 행보가 기대됩니다.

 

다이세쓰 유수공원(大雪遊水公園)

▲다이세쓰 유수공원 입구(왼쪽)과 물온도를 높이기 있한 유수지(오른쪽)

한 여름에도 차가운 다이세쓰산에서 내려온 물의 수온을 높이기 위해 만들어진 유수지를 1999년에 새롭게 완성한 다이세츠 유수공원. 현재도 농업에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중앙 공원에는 관리동(전망데크, 사무실, 휴게실), 중앙광장, 잔디광장, 오두나무 가든, 화단 등이 설치되어있고 서쪽에는 18홀의 공원 골프장도 있습니다.▲중일우호기념비 망향

공원 안으로 들어서면 맨발로 팔짱을 끼고 먼 곳을 바라보는 동상이 서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생각하듯 고민하는 모습에 언뜻 봤을 때는 이 지역을 대표하는 유명한 문학가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중일우호기념비 망향’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알고보니 이 유수지를 개발하기 위해 희생당했던 중국인 강제노동 희생자를 기리기 위한 동상이었습니다.

이름이 강제노동 희생자상이 아닌 중일우호기념비라니 희생자를 기리는 것이 아닌 두 나라의 우호를 기념하고 있는 동상을 보니 역사를 어떻게 해결하고 싶은지 알 수 있었습니다. 동상 아래에는 중국어, 일본어, 영어로 설명문이 있었습니다.

▲중일우호기념비 망향 일본어 비문

 

<중일우호기념비 ‘먕향’>

전시중 국책으로 에오로시(江卸), 츄베쓰(忠別) 제1 발전소가 건설되었으나, 이 발전용수는 약 14.4km의 터널로 흐르기 때문에 수온이 올라가지 않고, 하류의 7,926ha의 수전(水田)에 몇 번이나 냉해를 입혔다. 이 유수지는 그 대책을 위한 수온 상승 시설로써 건설되었다.

유수지 건설에 있어서, 노동력 부족을 보충하기 위해 1944년(쇼와 19년)9월에 338명의 중국인이 강제연행되어, 열악한 환경 하에서 가혹한 노동을 강요당했다.

그리고, 종전까지의 겨우 11개월여 동안, 88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죽음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 대부분은 젊은이들이었으며, 이국의 땅에서 고향의 부모나 친족을 눈에 그리면서 쓰려져갔다. 그 통한을 생각하면, 우리들은 참담함을 금할 길이 없다.

우리들은, 이 역사적 진실을 후세에 전하고, 나아가 중일우호의 발전과 영원한 세계 평화를 기원한다. 여기에 유수지를 다이세츠 유수공원으로 개보수, 완성을 기념하며, 88명의 중국열사의 영혼에 대한 심심한 염원을 담아 이 상을 건립한다.

 

2000년 (헤이세이 12년) 7월 7일
히가시가와쵸장 야마다 타카오

비문에는 강제연행에 대한 역사를 인정하고 그 희생의 사실을 명확하게 기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본어 설명문을 좀 더 자세히 보면 ‘강제노동’이라는 글자와 ‘쓰러져 갔다’라는 글자를 마치 지우려는 듯 긁혀져 비문이 훼손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강제노동 관련 글자가 훼손되어 있는 일본어 비문

강제노동과 그 죽음을 인정하고 밝히려는 이들과 이에 반해 인정하지 않고 지우려는 이들이 이렇게 극명하게 공존함을 드러내는 듯 했습니다.

 

〒071-1438 北海道上川郡東川町東8号北 (Higashi 8 Gōkita, Higashikawa-chō, Kamikawa-gun, Hokkaidō 071-1438)
교통  대중교통으로 직접가는 교통편은 없으나 비에이역에서 차로 30분, 아사히카와역에서도 차로 40분

구글지도 https://goo.gl/maps/2XmTyiUZV5u

 

중국인 순난열사위령비(国人殉難烈士慰霊碑)


▲중국인 순난열사위령비의 전경

히가시카와쵸 공동 묘지. 묘지에 들어서자마자 바로 오른쪽에는 다른 묘비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약1.5미터는 되어 보이는 중국인 순난열사위령비가 세워져있습니다. 공동 묘지 출입 도로에는 크게 안내 표지판도 세워져있습니다.

▲출입도로에 세워져있는 중국인순난열사위령비 표지판(왼쪽)과 비문이 적힌 위령비 뒷면(오른쪽) 

강제노동 희생의 사실을 지역 내에서 알리는 운동을 함께하고 있는 당일 안내를 도와준 츠카다 타카야 씨는 중국인 위령비의 비문을 보면서 ‘예전에는 이렇게 사죄의 말도 제대로 썼었는데 요즘에는 달라졌다’며 안타까워 했습니다.

위령비는 꽤 크게 제대로 된 일본식 묘비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조선인이나 중국인을 위한 위령비가 이렇게 제대로 된 형태로 되어 있는 것은 처음봐서 조금은 깜짝 놀랐습니다.

정면 아래에는 ‘중국인강제연행사건순난위령비건립실행위원’ 대표위원의 직함과 이름이 적혀있는데 아사히카와 시민, 아사히카와 시장, 히가시가와쵸장, 아사히카와 시의회의장, 히가시가와쵸 의회의장 등등 시와 쵸, 협회 등에서 장을 맡고 있는 분들의 이름을 줄지어 적혀 있습니다. 이 비석을 세우는 데 이 많은 정부 기관장과 이 많은 단체가 줄을 있고 있는 데 또 한번 놀랐습니다.


▲위령비 좌우 아래에 지자체 및 각 단체의 이름이 빼곡히 적혀있는 이름들

게다가 알고 보니 매년 묘지의 위령비와 유수공원의 ‘망향’의 동상 앞에서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놀라웠던 것은 앞에서 본 유수공원에서도 이 곳 묘지에도 ‘중국인’ 강제연행 희생자들을 위한 동상과 위령비는 있지만, ‘조선인’을 위한 것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히가시가와는 조선인 강제연행에 관해 많은 분들이 그 역사와 희생의 사실에 대해 적극적으로 연구하고 활동하며 일본 내에서 뿐만 아니라 한국에까지 희생자 및 유족 인터뷰를 할 정도로 유명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게 된, 같은 사건을 겪은 두 나라의 희생자를 추모하고 기억하는 일에 대해, ‘나라’를 구분지어 추모의 유무를 결정한다는 것이 강제연행과 강제노동에 대한 역사를 바라보는 방식이 얼마나 보수적이고 편협한가를 새삼 되새기게 되었습니다.

중국인 강제연행 위령비 뒷면에는 이렇게 적혀있습니다.

중국인 강제연행사건의 순난열사 여기에 잠들다

이 사건은 일본 군국주의가 중국 침략의 일환으로 행한 전쟁과 정부기관 및 군이 직접 지도하에, 중국인을 일본 국내에 강제연행 135사업소에 노역을 시키고 많은 중국인을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  1944년 이 땅에도 338명을 연행하여 에오로시 발전소 건설에 관련한 유수지 건설공사에 과도한 노동 및 연행 등으로 단시일에 88명이나되는 순난(殉難)이 발생했다.

유수지는 지금도 츄베쓰 하수의 수온상승 시설로서 히가시가와쵸 및 아사히카와시에 이르는 수전(水田)을 윤택하게 하고 있다. 우리들은 오늘날 일본의 주권자인 국민으로서 무엇보다도 중국 국민에게 마음으로부터 사죄하고 순난열사의 영을 추도하며, 다시는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군국주의의 부활을 저지하고 중일우호 중일 전쟁의 재발 금지를 구현할 것을 맹세하며 중일 양국민의 영원한 우호와 평화를 확립하는 스스로의 증명으로써 이 비를 건립한다.

1972년 7월 7일
중국인강제연행사건 순난위령비 건립실행위원회

강제연행에 대한 인정과 함께 누가 얼마나 어떻게 죽음에 이르게 되었고 마음으로부터의 사죄 및 추도와 함께 재발되지 않기를 맹세한다는 비문을 보면서 그래도 어쨌든 중국인 희생자들을 위한 동상과 위령비라도 이렇게 제대로 세워진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도시에서 일어나고 있는 강제노동에 대한 관점이 지금 일본 정부가 취하고 있는 관점과 직결되고 있다는 것에 우리가 어떻게 해야 ‘조선인 희생자’를 위한 추모가 가능할까 하는 고민을 안고 위령비를 뒤로하였습니다.  

 

〒071-1471北海道上川郡東川町ノカナン(Nokanan, Higashikawa-chō, Kamikawa-gun, Hokkaidō 071-1471)
교통  다이세쓰 유수공원에서 차로 21분

구글지도 https://goo.gl/maps/YjpmxnLDHBG2

 

북진 기념관(鎮記念館)

▲정면에서 바라본 북진 기념관

홋카이도 육상자위대 아사히카와 사단 주둔지에 위치해 있고 실제 군인들에 의해 운영되며 박물관과 전시물에 대한 설명 또한 자위대 장교에 의해 진행되는 북진기념관.

아사히카와 자위대 사단의 전쟁 기념관 격의 전시관으로써 일본의 입장에서 북쪽 홋카이도를 어떠한 방식으로 개척하였고, 그 시대적 맥락과 과정의 의의에 대해서 기념하고 있습니다.

북진 기념관은 과거 제국 일본군 중 구 제7사단에 대한 내용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이 부대는 1896년 홋카이도를 방위하기 위해 신설되었고, 개척을 위해 둔전병 제도(밭을 갈고 농사를 지으며 병역 의무를 다하는 병영 제도) 를 기본으로 진행되었습니다.

홋카이도 둔전병은 번을 폐지하고 현을 설치하면서 자리를 잃은 이들을 구제할 목적으로 시작되었고,1875년부터 이주가 시작되어 1899년까지 25년간 약 4만 명의 병사와 가족이 이주하였습니다.

구 육군 제7사단의 모형도를 통해 당시 얼머나 많은 군대가 주둔해 있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육군 내에서도 최대 규모의 주둔지로 ‘군사도시 아사히카와’가 탄생했습니다.

▲구 육군 제 7사단의 모형도

▲홋키이도 장관의 지방시찰

위 그림은 1885년 당시 홋카이도 장관 이와무라 미치토시가 산 위에서 들판을 내려다 보며 아사히카와에 대군단을 설치할 것을  구상하는 모습으로 아사히카와의 새로운 개막을 알리는 작품으로 유명하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그림을 자세히 보면 아래쪽에 무릎을 꿇고 있거나 낮은 곳에 그려져있는 아이누 민족과 대조적으로 장관이 위풍당당하게 지시를 내리는 듯한 모습에서 당시 선주민과 일본 본토의 관계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듯 합니다.

현재는 제2사단만이 남아 국제 사회의 평화와 안전을 확보·유지하기 위해 실시되는 유엔 및 국제기관의 활동 등에 협력하는 것이 일본의 국제적 책임이자 의무라며 각종 ‘국제 평화 협력 의무’와 ‘국제 긴급 원조 활동’에 참가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 일본 패전 후 1947년 연합군 최고 사령부의 주도로 일본 평화 헌법이 만들어졌고 여기에는 일본은 다른 나라와 전쟁을 하지 않으며 어떠한 군대도 보유하지 않겠다는 조항이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1950년대부터 군대와 비슷한 경찰 예비대, 해상 경비대를 만들고 1954년에 이를 ‘자위대’라는 이름으로 바꾸었습니다.

북진기념관은 일본 정부의 자위대, 그리고 일본 정부의 입장에서 역사와 명예를 기념하는 공간입니다. 굉장히 화려하고 깨끗한 전시장 내부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시설 또한 현대적으로 관광버스를 타고 관광을 오는 단체 관람객들이 줄을 잇기도 하는 대내적으로 여러 요소로부터 공식성을 부여받고 있는 전시관이기도 합니다.

〒060-0003 旭川市春光町陸上自衛隊旭川駐屯地内(Hokkaidō, Asahikawa-shi, Shunkōchō Rikujou Jietai Asahikawa Chudonchinai) 연락처  +81 0166-51-6111 관람시간 4월~10월 9:00~17:00 11월 ~3월 9:30~16:00 휴무 매주 월요일. 월요일이 휴일인 경우 그 다음 날 휴관 입장료 무료 교통 아사히카와역에서 아사히카와 전기 궤도 버스 · 도북(道北)버스를 타고(약 15분) ‘호국신사앞(護国神社前)’ 정류장에서 하차 후 도보 5분거리 

Web http://www.mod.go.jp/gsdf/nae/2d/hokutin2/top.html
구글지도 https://goo.gl/maps/J12HYquCZvr

 

카와무라 카네토 아이누 기념관(川村トアイヌ記念館)

▲카와무라 카네토 아이누 기념관 전경

가미카와(上川)지방의 대표적 아이누 가문인 가와무라가(川村家)의 8대 가와무라 가네토가 아이누 민족 문화의 올바른 전승을 위해 1916년 설립한, 일본에서 가장 오래되고 유일한 사립 아이누 자료관입니다. 아이누 민족의 문화나 관습을 엿볼 수 있는 생활 도구 등 다양한 자료가 전시되어 있으며,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도 마련되어 있습니다.

▲아이누 전통가옥의 외부 모습(왼쪽)과 내부(오른쪽)

카와무라 부부가 민간 차원에서 운영 중으로, 아이누 전통집의 모습과 집안 내외부 하나하나가 아이누 정신을 엿볼 수 있으며 온전히 아이누인의 관점에서 아이누의 의식주 문화와 민족의 생활에 관해 체험할 수 있는 곳입니다.

가와무라 가문의 아이누 전통 의상을 입고 전시된 아이누 문화 요소들을 친절히 설명해주시며 전통 노래 전통 악기를 연주하는 방법을 열심히 알려주는 카와무라씨의 모습은 단순한 일본인으로서의 삶이 아닌 주체적인 아이누인으로서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었습니다.

▲아이누 민족의 다양한 문화를 느낄 수 있는 전시실 내부

북진 개척의 역사 속에서 일본은, 지역마다 독특하고 고유한 문화를 갖고 있던 아이누인들의 삶의 터전에 대한 권리를 인정하지 않았고 근대화라는 이름으로 아이누 문화를 경시했습니다.

삶의 터전을 잃은 아이누 민족은 일본 사회 속에서 차별과 핍박을 받으며 한편으로는 본토에의 동화 정책으로 인해 현재는 대부분의 부족이 고유의 아이누 문화와 민족성을 잃어버리고 홋카이도 관광을 위한 소재로 이용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카와무라 기념관은 주체적인 아이누 문화의 자립성을 지켜 나가고 유지하고 전승하는 노력을 멈추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북진 기념관의 정부에서 지원하는 홋카이도 개척의 역사와 카와무라 아이누기념관의 개인의 힘으로 지키고 있는 홋카이도 고유의 아이누 민족의 역사를 동시에 바라보자, 개척이 어떤 문화를 파괴했는지, 같은 시간이 얼마나 다르게 기록되고 기억될 수 있는 지 가슴 깊이 다가왔습니다.  

 

〒070-0825 北海道旭川市北門町11丁目(Hokkaidō, Asahikawa-shi, Hokumonchō, 11 Chome) 교통 아사히카와 전기궤도 버스 24번 ‘호쿠몬초 21쵸메 방향’ 승차, 아이누 기념관 정류장에서 하차 연락처 +81 166-51-2461 영업시간 연중무휴 9:00~17:00 (7-8월은 18시까지 영업) 입장료 대인 500엔(450엔), 중고생 400엔(350엔) 초등학생 300엔(250엔) 미취학생 무료 (  ) 괄호 안은 단체 20명 이상
web http://k-aynu-mh.jp/ 

구글지도 https://goo.gl/maps/EASTd4hYQPx

 

pdf 파일 다운로드 : 평화디딤돌_1234시간여행자가이드북_북해도-5히가시카와아사히카와p.pd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