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가 사라졌습니다”

“아버지만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온 가족이 뿔뿔이 풍비박산 난 거지”

종로에서 정미소에 과자공장을 하면서 지금 생각해도 잘 사셨던 아버지. 결혼하여 자식이 세명이나 있었던 아버지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당시 나이 27살. 할머니는 어머니로부터 아버지가 일본으로 끌려간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으시고는(옛날 대부분의 시어머니가 그러하셨듯) 어머니를 심하게 구박하게 되고 어머니는 동생을 데리고 집을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지나 한국전쟁이 나고 가족은 물론이고 친척들 조차 생사를 알 수 없는 천애의 고아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현흥순. 올해로 79세가 된 강제노동 희생자의 유가족의 이야기입니다. 처음 뵌 현흥순 님은 키도 크시고 지금도 여전히 건장한 체격에 79세라고 믿기 힘들 만큼 건강한 모습이었습니다. 지금은 인자한 모습으로 마치 친할아버지나 친숙한 동네 어르신의 모습이었지만, 한때는 눈에서 광선이 나올 만큼 무서운 분이었다고 합니다.

인자한 모습의 현흥순 할아버지 ⓒ 박진숙
내가 외롭게 자라서인지
눈물이 많아요

옛날이야기하듯 기억나시는 대로 말씀해달라는 요청에, 현흥순 님은 기억을 더듬으며 이야기를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내 눈물을 머금은 목소리로 잠시 말을 잇지 못합니다.

“내가 고생을 많이 하고 외로움을 많이 타서인지 아버지 얘기만 하면..”

징용영장이 나온 것도 아니고, 나이도 많고 결혼해서 자식이 셋이나 있는데다가 학식도 있고 정미소를 할 만큼 경제적으로도 풍족했는데 끌려가신 아버지. 그때도 지금도 어떻게 끌려갔는지, 왜 끌려간 건지 이유는 알 수 없다고 합니다.

아는 일본 사람을 통해 이미 배를 타고 떠났다는 것은 확인할 수 있었지만, 어디로 어떻게 끌려갔는지 알 수 없는 채로 소식도 없이 시간이 흘러 8월 해방을 맞게 되었습니다. 같이 붙잡혀갔던 사람이 돌아와서 물어보니 ‘종익이는 이 배로 못 오고 뒷배를 타고 올 거예요’라고 하는 말에, 할머니는 가막산 정상에 올라 매일같이 무사히 돌아오도록 기도를 올렸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방개라는 이름 하나만 가지고
시간만 나면 찾으러 갔었어요

“사람은 어찌 됐든 뿌리를 찾아야 되잖아. 장가를 가고 자식을 낳고 내가 8월 추석이 되면 뿌리를 찾고 싶잖아. 애들한테 해줄 얘기도 있고..8월 명절이 되면 보름날 글루 가는 거야. 어려서 들었던 말만 기억하고”

너무 어렸을 때 가족도 일가친척도 다 잃어버려서 아버지 어머니 고향도 알 수 없었습니다. 할머니 손 붙잡고 다니며 들은 ‘방개’라는 지명하나 기억하고 찾으러 다니기만 수년 수 차례. 어스름 기억나는 곳에 가서 사람들을 붙들고는 무조건 ‘여기 방개라는 동네가 있습니까’하고 물어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매번 허탕치고 돌아오던 어느 날. 한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방개라는 이름 하나만 들고 찾아 다니던 때를 설명하는 모습 ⓒ 박진숙

“이봐 젊은이, 요즘 방개라고 하면 못 찾어. 지금은 적성면 율포리라고 해야지. 거기는 최서방들이 많이 살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따라 율포리로 갔습니다. 마을에 가서 이야기를 하자 최지웅이라는 사람이 현흥순 할아버지의 턱에 난 큰 점을 보더니 “누구네 집 조카 아녀? 처조카여, 어렸을 때 모습이 그냥 있네”라며 단박에 알아보았습니다. 알고 보니 고모네 친척으로 경찰관을 지내기도 하여 마을 사정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 찾아 헤매던 친척을 드디어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40년 전부터 수년간 수 차례를 포기하지 않고, 직접 발로 돌아다니며 찾을 수 있었던 가족의 소식이었지만, 여전히 아버지의 소식은 알 길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소식은 일본에서 홋카이도 한 시민단체로부터 전해져 옵니다. 올해로부터 40년전인 1976년. 일본 홋카이도에서 ‘소라치(空知)민중사 강좌’라는 모임이 발족되었습니다. 코겐지(光顯寺/광현사)에 모셔져 있던 강제노동 희생자의 위패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의논하며 “죽은 이 앞으로 편지를 보냅시다”라는 이야기까지 나눕니다. 그렇게 맨땅에 헤딩하듯, 매화장시 기록되어 있던 죽은 이의 이름과 본적지로 편지를 보내는 등 유족을 찾기 위해 수년간 수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홋카이도 슈마리나이 사사노보효(笹の墓標/조릿대묘표) 전시관·강제노동자료관(옛 광현사)에서 강제노동 희생자 위패를 앞에두고 강연(2004) ⓒ 동아시아공동워크숍

그러한 죽은 이의 유족을 찾기 위한 노력의 결과로 현흥순 할아버지는 드디어 아버지의 소식을 알게 된 것입니다.

“연락이 왔을 때는 가슴이 뛰더라구”

살았는지 죽었는지 만이라도 알고 싶었던 아버지의 소식은 일본 홋카이도 니시혼간지(西本願寺/서본원사)에서 기록하고 있었던 자료를 통해 죽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타카하시 종명. 쇼와17년(1942년)6월 13일. 종로5가.(본명 현종익인데 종명으로 잘못 기재되어 있었음) ⓒ 박진숙

자세한 이야기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카와구치구미(川口組/회사 내 작업 반으로 추정)라는 회사에서 탄광일을 했었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작년 2015년 9월 추석에 ’70년만의 귀향’을 통해 유골을 파주 용미리 ‘강제징용 희생자 묘역’에 모실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 아버지는 운이 좋은거여..”

아마도 그 옛날 집에서 서울을 나오려면 지나갔었을 파주. 정말로 집 근처로 ‘귀향’을 하신 거나 마찬가지라며, 아버지 기일도 알게 되었고, 혼백이라도 모시고 와서 얼마나 다행이냐고. 고마운 일이라고 말하는 현흥순 할아버지는 추석이며 기일이며 가족을 모두 데리고 용미리 묘역을 찾는다고 합니다.

 

강제노동 희생자 묘역에 안치된 현종익 희생자 ⓒ 평화디딤돌

이렇게 어쩌면 내 가족, 우리 할아버지의 일이었을 수도 있는 정말 가까운 과거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사실을 기억하고 되새기는 일은 다시는 이런 불행이 생길 수 있지 않도록 할 수 있는 작은 힘이 되지 않을까요. 어쩌면 영웅의 이야기만을 기록하고 기억하며 우리 자신들의 이야기는 잊고 말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자꾸만 불행이 반복되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한가로운 일요일 아침. 이천까지 바지런히 움직여 들을 수 있었던 현흥순 할아버지 이야기는 대부분의 집에서 겪었지만 지금은 잊고 있었던 우리들의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 기억을 돌에 새기고 기록하고 우리 가까이에 두고 되새김으로써 다른 세상·다음 세상을 위한 디딤돌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