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소녀상의 두 작가, 평화 디딤돌을 새기다”

이번 스토리펀딩 소개에 안내해드린 바 대로, 바로 다음주 화요일(4월 5일) 한식날 무렵에 맞춰 서울에 거주하던 강제노동 희생자의 이름을 각자의 기억이 서려있는 생활 공간 가장 낮은 곳에 놓게 됩니다. 평화 디딤돌 놓기의 시작입니다. 이를 위해 남아있는 자의 생애사 인터뷰와 현지 조사를 진행해 오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시선을 돌려 디딤돌 놓기 행동이 있기까지 중요한 역할을 한 두 인물을 만나고 왔습니다. 바로 평화의 소녀상을 탄생시킨 김운성, 김서경 두 조각가 부부입니다. 두 사람은 작년 홋카이도의 강제노동 희생자 유골을 모시고 온 ’70년만의 귀향’부터 지금까지 함께 해오며 동판과 공간 디자인, 그리고 이번 디딤돌 제작까지 그 역할을 도맡아 왔습니다.

평화 디딤돌이 놓여진 이튿날인 수요일(4월 6일 오후 2시 성공회 서울주교좌 성당 프란시스 홀)에는 역사적 기억과 추모의 사례를 듣고 논의하는 국제 심포지움 ‘기억의 예술’이 진행됩니다. 독일의 걸림돌(Stolperstein) 작가 군터 뎀니히(Gunter Demnig), 오키나와의 조각 작가 킨죠우 미노루(金城実) 등이 참여하는 가운데 이번 평화 디딤돌 구상과 실천에 대해 발표하게 될 주인공이 이 두 작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미리 찾아가 그간의 작업과 만남의 이야기를 듣고 왔습니다.

지영동 작업실로 찾아가는 길 ⓒ 윤정하 

두 작가의 작업실은 일산 지영동에 위치해 있습니다. 파주에 사는 터라 가까운 거리라 짐작하고 약속 시간에 맞춰 집을 나섰습니다. 웹 지도를 통해 약 1시간 20분 정도의 소요 시간을 확인했지만 개의치는 않았습니다. 이때까지도 험난한 여정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지금껏 파주에 살면서 난생처음 보는 번호의 버스를 타고 출발합니다.

우후죽순 신축 건물이 들어서고 있는 구불구불한 파주의 도로를 지나, 땅에 경계가 없다면 정말이지 아무도 모를 것 같은 ‘일산동구 지영동’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흔히들 일산이라고 하면 떠올리는 번쩍거리는 간판은커녕, 공사가 한창인 흙먼지 자욱한 비포장 도로가 저를 반겼습니다. 그렇게 비포장 도로를 지나, 동네 사이로 난 조그만 오르막 길도 지나고, 오르막 끝에서 만난 조그만 도로를 지나 마침내 하우스 형태의 작업실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어렵사리 도달한 김운성, 김서경 작가의 작업실 전경 ⓒ 윤정하

두 분은 조각가로 활동하고 있다. 조각이라는 매개는 무엇을 가능케 하는가, 각자의 생각을 묻고 싶다.

김운성 : 조각을 통해서 그러면 불가능한 것이 뭔지 모르겠는데. 조각이라고 하는 것은 3차원 공간, 입체를 통해서 표현하는 건데, 그런 면에서 좀 다른 매체보다 표현하고자 하는 부분들이 장점도 있고. 또 다른 장점은 공간 속에서 365도를 같이 보면서 실재감을 느끼게 하는 부분들이 있다.

단점도 있는데, 불편한 것은 그러다 보니 여러 가지 제재 요건들, 작업에 대한 어려움과 과정들, 그런 여러 차례 과정들을 거치면서 해야 되는 어려움들이 있는데, 그렇다 하더라도 표현하고자 하는 부분들이 그러니까 뭐.

불가능한 부분들은 없는데, 조각이 어떤 부분들에 그대로 표현하는 게 아니라 상상을 통해서 변형이 가능하기 때문에, 그런 것에 뭐 커다랗게 제약은 없고, 나름대로 상상을 통해 많은 부분이 변형 가능하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정리하자면 나름대로 조각을 통해 여러 가지를 표현하고 있다. 그 정도이다.

인터뷰 중 김운성 작가의 모습 ⓒ 윤정하

김서경 : 조각으로 무엇이 가능하냐고 하니,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스럽다. 글쎄, 조각을 가지고 뭘 해보겠다는 생각이 어떻게 시작됐는가 돌이켜 보면, 내가 이 사회를 보고, 내가 미술을 좋아하고, 그 속에서 조각을 하는 것이고, 그걸 통해서 사람하고 소통하고 싶었다.

그래서 뭐가 가능하다? 그런 것보다는, 이야기를 같이 나누고 조각에 대해서 함께하고, 거기에서 같이 공감해 주고 이런 사람들이 많기를 바라면서 작업을 한 부분이 있다. 전시의 목적도 그렇다. 내가 품고 있었던 이야기들을 사람들이 어떻게 해석을 할까 이런 것들도 궁금하고, 그걸 통해서 사람들하고 이야기를 하면서 소통을 하는, 그리고 그 소통의 매개체로 조각이 저희한테 또는 저한테는 필요했고, 그게 바로 조각인 것 같다. 그것이 여태껏 해왔던 생각이고, 그 생각을 가지고 해왔던 게 소녀상을 통해서 증폭된 그런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인터뷰 중 평화 디딤돌 조각 틀을 설명하는 김서경 작가 ⓒ 윤정하

홋카이도에서의 유골 귀향, 70년만의 귀향에 대해서, 처음에 어떻게 참여하게 되었는지, 용미리 묘역에 설치된 동판 제작 과정에서 어떤 이야기들이 오갔는지.

김운성 : 민족문제연구소의 김영환 씨에게 연락을 받았다. “70년만의 귀향이라는게 있는데, 도움을 좀 줄 수 있냐”고. 근데 그때 느낌이 무척 무거웠던 느낌이 있었다. 이야기할 때 상냥스럽게 잘 하는 사람인데, (막상 이야기를 들으니) 콱 막히는 느낌이었다. 울컥하는 부분도 있고, 옆에 김서경 작가한테도 이야기했는데 “뭐라도 해야 되는거야, 이제.” 정말 뭐라도 해야겠다는 느낌이었다.

따지고 뭐고 할게 없었어요

뭘 요구하는지 무조건 가서 해보자. 시간이 별로 없으니까 막 가서 해야 되는 시기고 해서, 얘기하고 논의하고 했다. 여러 의견이 나오는데, 둘만 일해서 되는게 있고 안 되는게 있으니까 부랴부랴 했다. 이런 일을 하게 되면 하나하나 점검하고 꼼꼼하게 해야 하는데, 받을 시간도 없었다. 무조건 해야 된다 그러니까, 조건이 어떻게 되느냐, 뭐 무대라든지. 그런 것 없이, 그냥 무조건 가서 보고 거기에 맞는 걸 우리 나름대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했다. 따질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하면서 무거운 것이 실체로 들어왔다가 약간 좀 덜어지고. 이런 식이었다.

김서경 : 야외 무대 미술이라는 것이, 야외무대 미술은 안 해봤지만 굉장히 색다른 경험이었다. 전혀 상상할 수 없는 형태의 것이었는데, 그래도 이렇게 마무리 지었다는 게, 많은 오류는 있었지만, 우리 나름대로는 아쉬운 점이 있었다. “뭐는 좀더 컸으면” “뭐는 좀 어땠으면” 이런 것들이 있는데 그 분들을 모셔오는 일 자체에 나라가 개입을 안 했다는 게, 나라가 도와주지도 않고 민간 차원에서 했다는 게 감동스러웠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도움이 될까를 생각하니까 뭐 다른 것보다, 이 일은 무조건 해결을 해야 하는데 우리 역량이 되는 한, 아니면 우리 역량이 안되면 다른 사람을 같이 유입을 하더라도 이 부분을 해결하려고 했는데, 다행히 우리 선에서 끝났다.

김운성 : 우리가 급히 SOS를 보내서, 김종도 화가라든지. 역시 그런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내가 처음 들었던 얘기를 전해주면 다 알아서 느끼고, 뭐 같은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다. 사실 일제 강제징용 희생자에 대해서 잘 알고 있지 않지만, 얘기를 하면 다 안다. 그것이 우리의 역사라는 것을 아니까 그냥 그 느낌이 오는 것 같다. 이야기만 하면. 이런 느낌이구나, 하는. 무거운 느낌.

그렇게 무대까지 디자인 하게 되었다.

김서경 : 엮이게 된거지? 얘기하다가..

김운성 : 이야기 하면서, 뭐가 정해지고 그것만 함께 한다는 식으로 얘기하지 않았다. 무조건 함께 하겠다는 식으로 얘기를 했다. 대체적으로 다른 회의에 가면 의견을 잘 얘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뭘 얘기하면 그 일이 다 우리들 일로 떨어지기 때문이다. 근데, 과거에 국립극장에서 연극이나 무대 미술 감독을 한 경험도 있고, 그런 경험들이 축적되어 있기는 했다.

어느 날 회의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보니 다 우리 일이 되어 있었다. 회의에 참여한 사람들 중에 우리밖에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예산도 부족하고, 다른 것들도 많이 부족해서 할 사람들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우리가 하자고 했다.

김서경 : 어떻게든 보탬이 될 수 있는 일을 하게 돼서 다행이다. 2주 전에 우리한테 연락이 왔다. 그 전에 연락이 왔어도 물론 열심히 했겠지만, 무조건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했다. 보탬이 되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이 나라에 서운한 마음이
좀 더 생겼고, 그래서 더
열심히 했던 것 같다
’70년만의 귀향’ 당시 용미리 납골당 앞에 선 두 작가 부부. 희생자 명단과 징용자 아리랑 가사가 담긴 동판을 직접 제작했다 ⓒ 평화디딤돌

작가로서 느낀 변화가 있었는지.

김서경 : 그 동안 소녀상 작업을 계속 해왔는데, 더 확장해서 일할 수 있어서 좋았던 것 같다. 역사의 피해자들에 대해서 더 많이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되어서 좋았다. 사람들은 위안부 소녀상을 많이 생각하지만, 그런 것의 연장선상으로, 희생된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그런 걸 알려내는데 연결이 되니까 우리에게는 많은 도움이 됐던 것 같다.

작품에 착수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김서경 : ‘역사를 기억하고 기록하는데 보탬이 되자’가 기준이다. 이미지가 굉장히 중요한 것 같다. 그래서 그 이미지가 힘을 갖게 하고 싶었다.

두 작가가 말하는 이미지의 힘을 작업실 속 작품들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 윤정하

김운성 : 나름대로 원칙들이 있겠지만, 의뢰 단체가 어디인지, 주최 단체가 어디인지, 어떤 내용인지, 그런 조건들 속에서 우리의 삶과 연결되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이완용같은 사람에 대해서도 작업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의 표현 방식은 다를 것이다. 그들이 친일을 한 내용, 그리고 그 삶 속에서 반성하지 않는 모습들, 그런 것들도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내용은 많이 다를 것. 조건들 속에 그런 것들이 쭉 있는 것 같다.

김서경 : 80년대에 대학 생활을 했다. 우리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방법은 조각이지 않나. 그것으로 뭔가를 하고 싶었다. 사회에 무엇인가 하고 싶었다. 사회를 보고, 그것을 외면하지 않고, 역사를 제대로 보고 그래서 그 이후에도 계속 비슷한 작업들을 해왔기 때문에, 개인 작업을 하더라도 4.3을 다루거나, 전태일 열사를 만들거나, 그런 작업들을 꾸준히 해왔다. 정읍에 동학농민봉기탑도 있고, 효순이 미순이 사건 때도 만들었고, 이러한 역사에서 비켜있지 않았고, 계속 그 한복판을 보려고 노력했다. 그게 기준인 것 같다. 이런 역사관?

사람들에게는
각자 본인의 몫이 있다

우리의 몫은, 우리가 가장 잘하는 조각이라는 매체이기 때문에 일상적으로 하고 있다.

수많은 이름과 정보에 대한 확인 절차가 반복해서 이루어졌다. 이름을 새겨놓고 틀을 다듬고 내놓기까지 구체적인 그간의 작업 과정을 듣고 싶다.

김서경 : 작업할 때는 정확한 명단이 와야 하는데, 그래야 이미지화 시킬 수 있는데, 명단이 계속 바뀌는 과정 때문에 어려움이 있었다. 동판을 제작할 때 지난번 같은 경우엔 동판에 부식한 것이다. 그 경우 필름을 떠야 하는데, 그 필름 값이 워낙 비싸다. 필름 작업 전까지는, 새길 글자들을 이미지화시켜서 만들어서 보내야 한다. 그래서 보내기 전까지 여러 번 명단 수정 작업을 거쳤다. 물론 그때 나도 어설픈 점이 있었다.

이제는 좀 괜찮을 것 같다. 동판은 필름이 나오면 바로 제작이 가능하다. 이번에 일본에 전달한 동판을 만들어준 곳에서 귀향 동판 작업도 같이 해줬다. 부식을 하려면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한데, 그 쪽에서도 촉박한 상황에서도 이런 일들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서 마음을 많이 실어주셨다. 이런 일들이 중요하다는 걸 알면, 그냥 대충 해주는 것이 아니라 온 마음을 다해 해주신다.

작업 중인 평화 디딤돌과 활자 시안들이 눈에 띈다 ⓒ 윤정하

그럼 이번 디딤돌도 같은 방식으로 만드는 것인가.

김서경 : 독일 작가의 경우를 봤다. 그가 만드는 동판은 활자가 복잡하지 않고, 대부분 영문이기 때문에 펀칭 기법으로 하는 것 같다. 그런데 그 기법으로 할 때, 한글이랑 한자는 없다. 그래서 주문 제작을 해서 하려면 어마어마한 일이 된다. 그래서 다른 방법들을 알아보고 있다. 정확히 어떤 방법으로 할지는 연구 중이다. 그 중에 레이저로 하는 것으로 거의 결정된 것 같다.

김운성 : 약간만 기술적인 부분으로 들어가면, 그런 차이가 있다. 한문, 한글은 세계적으로 많이 쓰지 않는다. 어쩌면 한문은 있을 수도 있지만, 한글은 쓰고 있는 민족이 별로 없기 때문에, 활자로 만들어져 있지 않다.

김서경 : 원래는 도장을 파서 흙에 찍어서 제작하면 될 줄 알았다. 그래서 알아봤더니, 동판에 있는 큰 글씨는 나오지만, 아랫부분에 있는 작은 글씨는 나오지 않았다. 실제로 제작을 하면 터지거나 문제가 생겨서, 나올 수가 없다고 하더라. 그래도 글자가 한 부분이라도 뚫려 있는 것은 괜찮은데 ‘ㅁ’처럼 막혀있는 글자가 나오지 않더라.

그런데 한글에는 막혀있는 글자도 많고, 작은 건 나오지 않아서 글자를 전체적으로 키우기로 했다. 어쨌든 그래서 펀칭 기법은 어려워서 레이저로 알아보고 있다. 레이저는 얕게 파지는 문제가 있어서, 최대한 깊게 새겨지는 것으로 알아보고 있다.

디딤돌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나.

김서경 : 이 일을 같이 하게 된 이유도 비슷한 것 같다.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분들하고 함께 일을 하게 되고, 그것이 역사를 제대로 기억하는 방법이 디딤돌이잖아요? 70년만의 귀향을 같이 하시면서, 납골당을 만든 것도 그렇고, 일본에 희생자들의 흔적을 남기고 온 것도 그렇고, 이런 역사를 기억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다).

나는 쉽게 생각한다. 내 아이의 아이들, 그 아이의 아이들의 미래가 보장이 안될 것 같다. 어떤 보장인가 하면, 전쟁이 없는 세상의 여성과 아이들? 약자의 인권이 보장되지 않는 세상이 계속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있다. 그래서 이런 것들 계속 기억해내고 약속을 해야 한다. 그런 각오의 디딤돌을 세운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그간 우리가 해왔던 활동과 무관하지 않다. 그래서 이 부분은 디딤돌을 세우는 그 뜻에 적극적으로 함께하고자 한다. 그리고 함께할 수 있어서 참 다행이다.

김서경(좌), 김운성(우) 작가 부부의 모습. 인터뷰는 2시간 남짓 이어졌다 ⓒ 윤정하

디딤돌이 역사를 기억하는데 기여할 수 있다는 생각인가?

김서경 : 그런 사람들도 있다. 왜 부끄러운 역사, 위안부와 같은 역사에 자꾸 활동을 하냐, 고 하는 사람들도 많다. 소녀상을 툭툭 치면서. 그런데 그런 역사가 없는 일이 아니지 않나. 그런 잘못된 역사를 반성을 해야지만 제대로 역사를 바로잡을 수 있지 않나. 그런 이유에서 역사가 기록 되어져야만 하고, 그 기록을 통해 미래 세대가 알게 되고, 그래야 오류를 범하지 않고 의미가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이미지화 됐을 때 힘이 있더라. 여태껏 해오고 보니. 그래서 그런 활동을 하는 과정에 있었고, 디딤돌도 그런 것 같다. 

김운성 : 내가 생각하는 디딤돌은, 강제징용 희생자들이 딛고 오는 디딤돌 같다. 그리고 평화디딤돌이라는 조직을 통해서. 그래서 디딤돌은 굉장히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디딤돌을 통해서 어떤 정보를 알 수 있는가. 개인의 정보를 알 수도 있지만, 그것을 통해서 그때 그 희생자들의 현실,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 (어떤 음식이) 얼마나 먹고 싶었을까? 그런 것들을 알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을 놓는 사람, 그리고 놓여진 사람, 또 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어떻게 그것을 바라볼 것인가. 활동을 알려나가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 그 당시 피해자들을 보면, 나이대가 다 젊다. 다들 그때 하고 싶었던 것들이 있었을 텐데, 시대와 상관 없이 그런 것들을 공감할 수 있게끔 알리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단어를 조금 바꿔 보겠다. 디딤돌이 역사를 기록하는 역할을 하기에 적합하다고 생각하는가.

김운성 : 물론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에는 또 다른 활동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또 다른 활동이라고 하면?

김서경 : 소녀상을 예로 들면, 소녀상을 세울 때 그냥 세우는 것이 아니라, 세울 때 단체가 조직이 된다. 그 단체가 조직이 되면, 소녀상을 세운 곳은 역사 교육의 장이 된다. 각 지방마다 다. 외국에 세우는 경우에도, 특별한 날, 가령 수요일 같은 날. 그때 모여서 교육을 하거나 이야기가 점점 넓혀져 나가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그런 상징물이 갖는 역할들이 있는 것 같다.

김운성 : 그런 게 있는 것 같다. 돌아가신 분들의 숫자가 함의하고 있는 부분이 있는데, 거기에 대해서 어떤 사람은 끌려간 날 애도를 하기 위해서 편지를 놓거나 꽃을 놓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돌아가신 날에 꽃을 놓을 수도 있고. 그러면서 “어, 이 사람이 누구지?”하고 더 알아볼 수도 있고. 그런 사람들이 SNS라든지 어딘가에 코멘트를 하게 될 수도 있고.

그 당시의 삶이 어떻게 보면 그 당시의 국제 정세였으니까, 끊임없이 알려나가는 것인데. 이번 국제 심포지움에 참여할 군터 뎀니히 선생이 걸림돌을 알려나가기 시작했을 적에, 나치 역사에 대한 그 시발점은 개인의 삶 속에서 시작이 되었다. 그게 지금까지 4만 여 개까지 놓여졌다니, 우리는 앞으로 100만 개를 해야 하는데,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당했던 거다.

 

첫 디딤돌로 놓여질 강제노동 희생자의 기억. ‘이 동네 사람’이란 문구로 시작된다 ⓒ 오승래

김서경 : 우리의 흔적들을 일본의 도로라든지, 공항이라든지, 댐 같은 곳에 놓을 수 있다면 좋겠다. 

김운성 :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애잔하게 다가오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예를 들면, 안네의 일기를 많이 이야기하는데, 한 사람의 이야기를 전체의 이야기로 확산해서 생각하게 되는 걸 보면, 한 사람의 이야기가 중요한 것 같다. 그런 것들이 새로운 시작이 되어주는 것 같다. 김서경의 삶이 있었네? 김운성의 삶이 있었네? 우리 이웃의 삶이었네? 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김서경 : (디딤돌에 새겨질) ‘이 동네 사람’이라는 말이 참 좋은 것 같다. 이러한 개인사를 잘 알릴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