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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루후츠 마을, 평화로운 적막 속에 강제연행의 기억이 드리우다

오호츠크해를 마주한 일본 최북단의 무라(마을), 사루후츠는 인구 약 3000명의 무라로 어업과 낙농업이 번창한 평화로운 곳입니다. 그러나 태평양전쟁 중, 이 마을과 인접한 浅茅野(아사지노)에서는, 일제의 비행장 건설을 위하여 조선에서 강제연행 된 노동자들이 처참하게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 건설 현장에는, 배고픔과 가혹한 노동을 견디지 못해, 탈주하는 사람과 목숨을 잃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사망자의 수는 수 백 명이라고 전해지고 있지만, 정확한 숫자는 알 수가 없습니다. 현재 비행장터는 목초지가 되었고 근처에 정문과 급수시설만이 덩그라니 남아있습니다.

조선인의 유골이 신증사(信證寺)에 있는 이유

신증사에는 강제노동 중에 사망한 100여명의 조선인의 각 사망년월일ㆍ사망원인ㆍ사망시의 연령ㆍ이름 등이 기록된 過去帳(과거장) 이라고 하는 것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이 절의 주지인 奈良陸雄스님은 수년전, 비행장 터 부근에서 당시 강제연행된 분들의 것으로 짐작되는 유골을 발견하여 그것을 六角堂(육각당)에 보관해서 공양해오고 있습니다. 스님의 설명에 의하면 유골은 화장된 듯하지만, 거의 타지 않은 채 묻힌 것 같다고 합니다. 이 육각당에는 아사지노 비행장 건설공사에서 사망한 뒤, 조선에 돌아가지 못했던 여러 조선인들의 유골이 함께 안장되어 있습니다.

신증사의 육각당에는, 아사지노 비행장 건설에서 강제연행 되어 죽은 조선인의 유골을 소중히 보존해 왔습니다. 당시를 기억하는 마을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아사지노에 강제 연행된 조선인은, 한밤중에 강제로 징용서를 받아, 잠이 채 덜 깬 채 트럭에 실려 오는, 등 매우 비상식적인 방법으로 끌려온 사람이 태반이었다고 합니다. 奈良陸雄스님은 당시의 증언에 의거해서 ‘아직 나리타(成田) 연못 근처에 유골이 남아있지 않을까?’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나리타 연못 근처에는 1950년대까지 마을의 공동묘지가 있었다가 현재는 폐쇄된 곳입니다.

신증사의 본당 / 신증사의 육각당

신증사의 본당 / 신증사의 육각당

심재명(沈載明)씨의 증언하는
아사지노 비행장 건설 당시 조선인 강제노동의 참혹한 현장

죄인도 아닌데, 마치 형무소처럼 자물쇠가 걸린 [타코베야(タコ部屋/문어의 방: 조선인 강제노동자의 숙소로 문어의 통발처럼 들어가면 빠져나갈 수 없다고 해서 문어의 방이라는 이름이 붙었다.)]에서 자고 일어나, 채찍을 맞아가며 광차를 밀고, 영양실조와 집단린치로 차례차례 죽어간 청년들…

현재 아오모리(靑森)시에 살고 있는 재일 한국인, 심재명씨(69)는 아사지노 비행장 건설 현장에서 탈주해서 살아남은 분입니다. 훗카이도의 광산을 탈주해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14년간을 산속에서 숨어 지낸 중국인의 예도 있지만, 심씨의 경우는 일본농민과 아이누인, 등 서민들의 직ㆍ간접적인 협력으로 붙잡히지 않을 수 있었다 합니다.

쇼와 18년(1943년) 5월말, 당시 20세였던 심씨는 서울(경성)에서 고향 충청북도 천안군 목천면 응원리로 돌아왔다. 공장의 견습공으로 서울에 살던 심씨는 사장의 신뢰를 얻어, 독립을 할 꿈에 불타있던 때였고, 8개월 된 아이를 임신한 새색시와 함께 친지들을 보기위해 잠시 고향에 내려왔었다고 합니다. 고향에 내려온 어느날 밤, 이장이 심씨의 집을 찾아, 살며시 심씨를 불러냈습니다. “실은… 군의 명령이 있어서…”라며 꺼낸 얘기는 훗카이도로 징용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출발은 바로 다음날 아침이었습니다. “너는 어차피 밖에 나가 있었고, 아직 젊으니까 병약한 형을 대신해서….”

이것은 이미 절대적인 명령이었습니다. 심씨가 거절하면 심씨의 형이 가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만일 그가 거절해서 다음날까지 할당된 인원수를 모으지 못하면 응원리 전체에 지독한 탄압이 시작될 것은 뻔한 일이었습니다. 더군다나 밭에서 일하고 있던 사람들을 그 자리에서 연행해간 예를 사람들도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고향 마을에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는 이 갑작스런 징용을 승낙하는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다음날 이와 같은 사실을 모르던 아버지와 어머니를 뒤로하고 아내와 형의 울음소리를 뒤로 한채, 심씨는 강제징용 트럭에 올랐습니다.

강제연행 노동자의 입욕/ 강제연행 노동자의 취침

강제연행 노동자의 입욕/ 강제연행 노동자의 취침

멀어진 고향은 불러도 불러도 대답이 없다

심씨는 고된 노동을 각오하고 일본에 왔지만 감옥과 같은 타코베야에서 강제노동을 할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다고 합니다. 심씨와 함께 천안에서 떠나온 100여명 가운데 일본패전까지 생존이 확실한 것은 5~6명 뿐이었다고 기억합니다. 그가 가장 먼저 충격을 받은 것은 처음 도착하던 날 밤, 합숙소에 자물쇠가 걸렸을 때였습니다. 막 신축된 합숙소는 침상, 변소, 식당이 하나의 방에 있는, 창문도 없는 벽으로 둘러쌓인 형무소 같은 타코베야였습니다. 날이 밝자, 형편없는 식사와 장시간의 가혹한 노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아침은 5시 기상. 무 씨레기를 섞은 중간크기 밥 한 사발, 된장국 한 사발이 아침식사의 전부였고, 식사가 끝나면 바로 현장에 나와 6시까지 중노동이 이어졌습니다. 들것을 짊어지거나 광차를 미는 등의 흙의 운반이 주된 일이었습니다. 오전 중 1회 15분의 휴식. 점심식사는 리어카에 날라져 온 도시락을 30분간의 휴식시간에 먹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오후에도 1회 15분의 휴식. 하루 노동의 끝은 ‘어두워질 때까지’였으므로 여름날의 노동시간은 13시간에서 14시간이었습니다. 저녁식사도 아침과 마찬가지였습니다.

금세 체력은 쇠약해져 가고, 약한 사람부터 차례로 영양실조에 걸려, 환자가 속출했습니다. 현장의 감시인들은 폭력단 출신자가 많아서 동작이 늦은 사람들은 몽둥이로 두들겨 맞기 일쑤였습니다. 늘 이슬비가 내리던 작업장에는, 채찍소리와 비명과 ‘아이고ㅡ’소리가 멀리 비행장 밖 농가까지 들렸다고 마을사람들은 말합니다. 밤이 되면, 짧은 식사 뒤에 골아 떨어져 누가 엎어가도 모를 만큼 깊은 잠에 빠져야 했습니다. 작업복은 1벌 뿐으로, 비와 땀에 찌 들은 채 그것을 이불삼아 자고, 매일 그대로 입어야 했습니다. 비위생적인 환경 역시 건강을 더 악화시켰습니다.

어느날 밤, 심씨가 소변을 보기위해 일어나 변소에 가려하는데, 양 옆에서 ‘와삭와삭’ 하는,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것은 아무 죄 없이 끌려와 타코베야에 갇혀 인간 이하의 삶을 살고 있던 젊은이들이 고향을 생각하며 숨죽여 우는 소리였습니다.

 1997년 동아시아 공동워크샵 유골발굴 현장에서 수습된 조선인의 유골

1997년 동아시아 공동워크샵 유골발굴
현장에서 수습된 조선인의 유골

살려주세요, 용서해주세요

심씨가 도착한 1주 후에는 다시 경상도로부터 강제연행 된 조선인 50명이 더해져있었습니다. 이들은 충청도 출신 사람들에 비해서 일본의 사정에 밝은 사람이 많았고, 그런 만큼 탈주를 시도하는 일도 많았다고 합니다. 심씨가 오고 2주가 지난 날, 작업현장에서 탈주를 시도한 사람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3일 만에 그는 체포되었고, 합숙소의 입구 앞에서 본보기로 전원의 눈앞에서 일본인 간부에 의해 처벌을 받았습니다. 곡괭이의 굵은 자루로 등을 마구 때리고 기절해서 나뒹굴면 다시 물을 끼얹어 깨우는 것이 반복되었습니다. 그는 땅에 엎드려 손을 모아, “살려주세요”, “용서해주세요”라고 빌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곡괭이 자루질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보고 있던 동포들은, 견딜 수가 없어, 침상에 기어들어가 귀를 틀어막았지만 “퍽”, “쿵” 하는 때리는 소리와 비명이 계속 들렸습니다. 대부분의 탈출자들은 이러한 처벌을 받았고, 처벌 받은 사람들의 대부분은, 발열과 설사를 일으키며 죽어갔습니다. 가혹한 환경 속에서 탈주자는 계속 늘어갔지만, 성공한 예는 적었습니다.

참고
本多勝一, 『훗카이도 탐험기』
하마돈베츠 고교 향토회, 『아사지노 비행장에 대하여』
동아시아 평화마을 편집부, 『2001년 자료집』

글ㅣ2006 동아시아 공동워크샵 미디어팀ㅣ조일동
편집ㅣ2006 동아시아 공동워크샵 미디어팀ㅣ조현상